1873년에 황해도 재령군 남률면 봉고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에 멕시코로 이민을 가서 유카탄의 초촐라(Chochola) 농장에서 일하였는데, 이 때 농장의 큰 벽에 그림을 그려 농장주들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졌다. 부인이 제주에서 태어난 해녀 출신이기에 코아트사코알코스(Coatzacoalcos)에서 물고기를 잡아 굶주림을 이겨내기도 하였지만, 그는 초촐라 농장에서 계약 노동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탐피코(Tampico)로 가서 식당을 경영하였다. 이를 통해서 돈을 많이 벌어 멕시코 한인 가운데 경제적으로 가장 빨리 성공한 한인이 되었다. 많은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였는데, 경영하던 한옥 레스토랑을 팔아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탰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처럼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이국에서 살면서 일생을 바쳤는데도 해방 후 조국이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는 것을 보고는 크게 실망하였다고 한다. 82세이었던 1955년에 사망하였으며, 현재 돌로레스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슬하에는 장남 호세 김과 차남 프란시스코 김, 장녀 마리아 김을 두었다. 한국 이름이 김동철인 차남 프란시스코 김은 공인덕의 딸과 결혼하였고, 마리아 김은 호놀룰루에서 온 김수권(金守權)과 결혼하였다. 김동철의 아들인 아벨 김(Abell Kim Kong, 김재완)은 현재 멕시코시티에서 살고 있고, 김수권의 아들인 로돌포 김(Roddolfo Kim)은 황보영주의 딸인 마르타 황보와 결혼하였다.
김익주는 탐피코에서 식당을 경영하면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탐피코지방회를 결성하였으며, 회원 등록과 함께 독립의연금 모금에 앞장섰다. 1917년부터는 탐피코지방회의 파출위원(派出委員)을 역임하였다. 이때 여러 차례에 걸쳐 대한인국민회에 자금을 지원하였고, 멕시코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독립의식을 갖도록 애썼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익주는 매일 밤에 회원들과 자신의 집에 모여 후속 대책을 협의하였다. 특히 미국의 국민회와 연락하면서 향후 조처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1919년 4월에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서 멕시코 탐피코지방회의 이름으로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상해에 본부를 둔 대한민국적십자사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이후에는 탐피코지방회 회장을 맡아 3·1운동 기념행사, 순국선열기념식 등을 주관하며 한인 사회에서 민족의식을 높이려고 노력하였다.
1930년에는『신한민보(新韓民報)』1월 23일자에 한인 부인들의 부도덕한 점을 들어 멕시코 한인들을 모욕하는 기사가 실렸다. 멕시코 한인들은 몹시 흥분하였고, 대한인국민회 묵경(墨京)지방회에서는 2월 26일에 임원회를 열어 글의 내용을 반박하면서 신한민보사를 규탄하였다. 곧이어 김인주는 묵경지방회를 해산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한인자성단을 조직하였다. 김인주와 이인녀 등 한인자성단 참여자들은 주로 흥사단(興士團) 계열이었는데, 1932년에 안창호가 상해에서 체포되자, 동지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1백원을 모금하여 보내는 등 흥사단을 통한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이처럼 대한인국민회와 한인자성단은 활동 목적이 같았으므로, 1935년 5월 26일에 한인의 단결과 합작을 위해서이전의 묵경지방회와 한인자성단의 조직을 합하였다. 그 뒤에도 김익주는 1941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조국 독립의 의지를 더욱 불태우며 독립운동 자금모집에 힘을 쏟았다.
1999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