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흥사단(興士團) 단원으로 멕시코로 이주하여 멕시코 한인 사회의 형성을 주도하였다. 특히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묵경지방회(墨京地方會)를 복원하고, 한국의 독립운동과 대일 선전포고의 입장을 강조하여 멕시코 한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애쓰도록 도왔다. 그의 활동상은 외손자인 김수명(Rodolfo Kim)에 의해서 알려져 있다.
1895년 1월 5일에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지금의 평안남도 대동군으로 이주하여, 6년 동안 서당을 다닌 뒤 육영소학교를 마쳤다. 1914년에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고, 1917년에 숭실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그 뒤에는 평안북도 강계군의 영실중학(英實中學)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강계 지역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면서 일제의 경찰차를 폭파하였다. 이 때문에 일경의 추적을 받았고, 그것을 피해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의 삼육신학대학에서 7주 동안 머물면서 교육 과정을 마쳤다.
그 뒤에는 흥사단에 들어가 14명의 한인 학생들과 함께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여행증서를 받아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 뉴욕에 이르렀다. 1921년 경에는 멕시코로 이주한 친척을 만나고자 멕시코에 입국하였는데, 케레타로 엔 시니라스(Queretaro en Cinilla)라는 작은 마을에서 목동으로 일하다가 그곳의 여성과 결혼하였다. 이후 멕시코 한인 이민자들이 처음에 도착하였던 베라크루스주(Veracruz州)의 코앗사코알코스(Coatzacoalcos)에 머물면서 미국의 더뷰크(Dubuque)대학에 유학하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대신 멕시코시티로 거주지를 옮겨 택시 운전사로 생활을 꾸렸다. 1941년 12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멕시코 지방위원인 이순녀, 한종원(韓宗源) 등과 함께 오랜 시간 동안 폐쇄되었던 묵경지방회를 다시 설립하였다. 이 때에 황보영주는 ‘묵경지방회 청년가’ 등을 비롯한 여러 시가(詩歌)를 지어 멕시코 한인 이민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윽고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멕시코시티의 3대 일간지에 12월 20일자로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포고와 한국의 독립운동, 멕시코 한인들의 입장을 게재하였다.
황보영주는 멕시코 한인 사회의 단결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대한인국민회 묵경지방회 총무와 서기로 활동하였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묵경지회에서도 적극 활동하였다. 1959년 2월 19일에 고국에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면서 멕시코시티에서 사망하였다. 딸인 마르타 황보는 1919년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주해 온 김수권(金壽權)과 결혼하였다.
멕시코에서의 독립운동 공훈이 인정되어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