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한인의 단결과 함께 독립운동 지원을 주도한 한인 단체로, 코아트사코알코스(Coatzacoalcos)지방회, 묵경(墨京; Mexico)지방회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에 속한 멕시코 3대 지방회의 하나였다.
멕시코 한인들의 단결과 민족 정체성 유지를 도모하기 위해서 설립되었으며, 나아가 조국 독립운동에 기여하도록 이끌었다.
1909년 5월 12일에 멕시코 에네켄(henequén)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들은 4년 동안의 계약노동을 마치고 나왔다. 멕시코의 일본인들은 이전부터 한인들을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인들은 농장에서 나오기 전부터 생존을 위해 미국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황사용(黃思溶)과 방화중(邦化重)을 견묵위원으로 선정하여 멕시코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4월 3일경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한 견묵위원은 15일에 멕시코 유카탄(Yucatán)의 메리다(Mérida)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멕시코 한인들을 위로하면서 대한인국민회의 설립 목적을 설명하며 지방회 조직에 나섰다. 당시 한인 가운데 314명이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5월 9일에 메리다 지역 16곳의 농장에서 파견된 대표를 포함한 70여 명이 모여 메리다지방회 창립대회를 열었다. 이근영(李根永)이 초대 회장을 맡았고, 부회장에 방경일, 총무 및 재무에 김윤원, 서기에 신광희, 학무원에 황명수, 법무원에 조병하, 구제원에 김제선, 평의원에 김구현·최정식·이근하·이국빈·유진태·김대선·김성민·김태진·박선일 등이 선임되었고, 24일에 대한인국민회의 인준을 거쳐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이들 임원의 임기는 대한인국민회 총회의 규정에 따라 1년이었으며, 지방회는 매달 통상회를 개최하였다. 1910년 4월에 열린 통상회에서는 규정에 따라 신임 임원을 선출하였는데, 회장은 정춘식이 맡았고, 부회장에는 서현우, 총무에는 이명원, 서기 및 재무에는 신광희, 법무에는 이환응, 학무에는 허완, 구제에는 정덕천, 사찰에는 김동완·이홍선, 외교원에는 이업동, 평의원에는 이근영·김윤원·김제선·이수근·공인덕·감문형·김귀연·박국천·이화용 등이 임명되었다.
1910년 말경부터 멕시코 혁명은 본격화하였다. 혁명의 여파로 유카탄 지역에서 일자리가 줄자, 생활고를 겪는 한인들은 점차 유카탄을 떠났다.이에 따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에서는 멕시코 한인들을 하와이로 집단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그 뒤에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되면서, 유카탄 지역의 한인들은 1911년 1월에는 타바스코주(Tabasco州)로 이주하였고, 12월에도 약 3백 명이 베라크루스주(Veracruz州) 남쪽 끝의 와하케뇨(Oaxaquenō) 지역으로 이주하였으며, 9월에 과테말라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다수가 사망하였다. 메리다지방회의 임원도 이주에 참여한 탓에, 1912년 1월에 다시 임원을 선출하여, 회장에 이종오, 부회장에 박창식, 총무에 허완, 서기 및 재무에 김기창, 법무에 김명순, 구제에 정덕천, 외교에 박정림, 대의원에 최이상·박두현, 평의원에 이수근·이건하·방한규·주경호·김승호·김춘경·김상옥·김상여·정원일, 사찰에 이귀봉 등이 선임되었다.
멕시코 한인들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지면서, 한인 사회의 분위기도 매우 해이해졌다. 이에 따라 메리다지방회는 한인들 사이의 규율과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 1912년 1월 특별회를 열어 ‘자치제도’ 7개조를 만들어 실행하였다. 다만 회원들이 매달 납부하는 연금으로, 대한인국민회 총회에 내는 의무금과 지방회를 운영하는 경비를 충당하였는데, 1913년 초부터 베누스티아노 카란자(Venustiano Carranza)의 입헌파와 판초 비야(Pancho Villa) 등이 쿠테타로 집권한 빅토리아노 우에르타(Victoriano Huerta)에 저항하면서멕시코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의무금도 제대로 내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이 해 말에 지방회를 확장하기 위한 특별의연금을 모금하였고, 회관을 유지하기 위해서 1915년 5월부터는 ‘50전 동맹’을 만들어 모든 회원이 매달 50전씩을 납부하도록 하였다. 한편 1914년에는 무법 행위로 동포를 해치고 단체를 해롭게 하는 한인을 제압하고자 멕시코 메리다경찰서의 허가를 받아 순행경찰제를 실시하면서, 방경일을 순행경찰로 선임하였다. 또한 1915년에는 각 농장에 흩어져 있는 한인의 동향을 파악하여 각 회원의 의무를 권고하려고 각 구역마다 대표 1인씩을 두었다. 그 뒤 1916년 1월에는 자치 규정을 메리다 지방법원에 청원하여 허가를 받은 단체가 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멕시코 한인들이 거주하는 여러 지역에서 지방회를 조직하였다.
1917년부터 멕시코의 경제는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1918년 4월에는 매달 납부하는 연금을 2원 50전으로 올려, 지방회 회관 유지와 사무 정리, 해동학교 유지와 발전, 묵경에 공비생(公費生) 파견, 교육금 적립, 지방회 기본금 적립 등의 5가지 사업을 추진하였다. 경제적 호전에도 불구하고, 1920년에 들어서도 메리다 지역에서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인들은 유카탄의 농장에서 일을 하지 못하였고, 일을 하더라도 임금이 낮아 밥값을 대기도 어려웠다. 이로 인해 4월에 유카탄 지역의 한인들은 베라크루스 주변의 산타 페(Santa Fe) 지역 사탕수수 농장으로 집단 이주하였다.
한인들의 생활이 회복되지 못하자, 1917년에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인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멕시코 한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각 지역을 돌아다녔다. 안창호는 10월 12일에 산 호세호(San José號)를 타고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12월 2일에 메리다에 도착하였다. 그는 메리다의 에네켄 농장 주인들을 방문하여 한인 노동자들의 신용을 확신시켜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도록 도왔다. 이 과정에서 메리다지방회는 1918년 2월에 ‘노동규정’을 제정하였다.
한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멕시코에 전해지자 멕시코 한인들은 거의 매일 회관에 모여서, 이후의 운동 방향에 대해 토의하였고, 독립운동을 지원하고자 하였다. 4월 15일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훈시를 받아 대한공화국의 건설과 새 정부의 조직을 축하하는 경축식을 거행하였고, 북미지방총회의 포고에 따라 3·1운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1인당 1페소(peso)씩의 연금을 달마다 거두었으며, 대한인국민회 총회에 의무금, 가옥채, 기계채 등도 보냈다. 그밖에도 여러 특별의연금, 동맹저축, 애국동맹금 등도 모았는데, 특히 1919년 1월에는 파리평화회의 대표자 파견을 위해서1인당 20페소 이상의 특별의연금을 거두었다. 1919년 12월 1일까지 메리다지방회에서 대한인국민회 총회에 보낸 돈은 약 1천 달러 정도였다.
그러나 멕시코의 경제 사정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면서, 1921년 3월 6일에 274명의 멕시코 한인들은 쿠바로 다시 이민을 떠났다. 당시 메리다지방회 회원 42명과 그 가족 95명도 쿠바로 이주하였는데, 1923년 1월에 지방회에서 조사한 한인은 유카탄 지역에 장정 115명, 부인 73명, 남아 55명, 여아 55명 등 모두 298명이었다. 1924년 2월에 실시된 인구조사에서도 장정 116명, 남아 51명, 여아 51명 등 총 287명에 불과하였다.
메리다지방회는 설립 이후에 유진태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가 회관 건축을 추진하였다. 곧 1930년∼1931년경에 한인 1세의 지도급 인사인 유진태, 이종오, 박춘삼, 김정식 등은 메리다시(市) 65번가에 회관을 짓기 위해서 모금운동을 펼쳤다. 다만 멕시코의 토지법에서 외국인은 건물이나 토지를 매입할 수 없었으므로, 일부 한인이 멕시코로 귀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8명이 공동명의로 토지를 구입하여 회관을 지었는데, 1935년 1월에 낙성식을 거행하였고, 1941년과 1954년에 보수 공사를 하였다.
메리다지방회는 설립 이래 멕시코 한인의 이익을 옹호하고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기관으로 기능하였다. 특히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도 나라를 잃어 국제사회의 미아가 되어버린 현실을 벗어나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특히 에네켄 농장에서 반노예적인 노동 조건과 착취를 견디면서 돈을 모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였다.
다만 메리다지방회는 한인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곧 초기 이주 한인들이 자본을 축적하지 못하였던 데다가 멕시코 혁명으로 인한 내전 때문에 한인 사회의 안정을 이룰 수 없었다. 또한 멕시코로 이민을 온 한인 가운데는 한인 사회를 이끌어 갈만한 지식을 갖춘 지도자들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메리다 지역의 한인들은 지방회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한인 사회를 안정시키고, 독립운동을 후원하는데 힘썼다. 특히 군인 양성 기관인 숭무학교(崇武學校)를 설립하여 원동지역의 독립군으로 보낼 계획을 추진하였던 것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