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묵경 지방회는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 설립된 대한인국민회의 지방회이다. 1905년에 멕시코로 이민 간 한인들은 1909년 ‘묵경(墨京)’이라고 부른 멕시코시티로 이주해 묵경지방회를 설립하였다. 1910년 멕시코 혁명의 여파로 한때 회무가 정지되었으나, 1915년 새 회장과 임원진을 임명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묵경지방회는 언론계와 종교계를 통해 독립선언의 내용을 알렸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이후 묵경지방회는 멕시코 정부와 외교적 교섭을 벌여 한인의 안녕을 위해 노력하였다. 여러 외교적 노력을 통해 한인들은 ‘자유 한인’으로 대우받게 되었다.
정의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 설립된 대한인국민회의 지방회.
개설
연원 및 변천
1910년에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자, 멕시코시티는 혁명의 중심지로 자리하였다. 1913년에는 통신이 불통되는 등 여러 상황이 매우 불안하였다. 북미지방총회는 묵경지방회와 연락이 되지 않아, 8월에는 서기 겸 재무에 이국빈, 사찰에 이인식·이종화를 임명하고 대의원 1명만 지명하였다. 한인들이 대부분 멕시코시티를 떠나면서, 1914년에는 떠나지 않은 회원들만으로 유지하였을 정도였지만, 다음해 초부터는 아예 회무가 정지되었다. 11월에 다른 지역으로 피난하였던 회원들이 다시 모여 통상회를 열고는 와하케뇨(Oaxaquenō)지방에서 온 서현우를 회장으로 뽑고, 부회장에는 윤은섭, 총무에는 이인여, 서기에는 서윤, 재무에는 이순녀, 학무원에는 이병권, 법무원에는 김동완, 구제원에는 김광윤, 외교에는 이청룡, 사찰에는 홍정봉, 대의원에는 김동현을 임명하였다. 아울러 한인들이 주로 옮겨간 탐피코(Tampico) 등지에 한인들의 단결과 상호 부조를 위해 대한인국민회 관할 경찰소를 설치하였다. 1919년 말에 묵경지방회가 관할하는 여러 지역의 회원은 멕시코시티 10명, 탐피코 10명, 베라크루스(Veracuruz) 10명 등 총 30명이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묵경지방회는 언론계와 종교계를 통해서 독립선언의 내용을 알렸다. 특히 9월 7일에는 법무원을 맡고 있던 이순녀의 주선으로, 멕시코시티에서 가장 큰 교당인 엡윗청년회에서 ‘한국을 위한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30년에 대한인국민회에 대항하는 ‘한인자성단’이 결성되어,『신한민보(新韓民報)』1월 23일자에 멕시코 한인 부인들의 부도덕한 점을 들어 한인들을 모욕하는 글이 실리자, 2월 26일에 임원회를 열어 그 글을 반박하고 신한민보사를 규탄하기도 하였다.
기능과 역할
참고문헌
- 『중남미 한인의 역사』(김도형, 국사편찬위원회, 2007)
- 『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Ⅲ―멕시코·쿠바편(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국가보훈처, 2003)
-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이자경, 지식산업사, 1998)
-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용, Reedley California, 1959)
- 「멕시코지역 대한인국민회의 조직과 활동」(김도형,『국사관논총』107, 국사편찬위원회, 2005)
- 「멕시코 한인사회와 독립운동」(김도형,『아시아 아메리카 연구』5-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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