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에네켄(henequén) 농장에서 일하였던 한인 가운데 멕시코시티(Mexico City)에 거주한 한인들은 1911년에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묵경지방회(墨京地方會)를 설립하였다. 그 뒤 1928년에 그 아래에 묵경한인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강령에는 대중운동 후원, 본국정신 고양, 지식 개발, 실업 증진, 우리 글과 우리 말 보급, 토론회와 강연회, 청년의 영예를 증진 등 모두 7개의 목표가 담겨 있다. 멕시코 사회에서 한인 청년들이 자부심을 갖고 생활하도록 독려하였다.
1905년에 멕시코로 이민을 온 한인들은 4년 동안에네켄 농장에서 일하였다. 그 뒤 멕시코 전 지역으로 흩어졌는데, 그들 가운데 일부는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에 거주하였다. 당시 한인들은 멕시코시티를 ‘묵경(墨京)’이라고 부르고는, 1911년에 대한인국민회 묵경지방회를 세웠다.
1910년대에 멕시코시티에 살았던 한인은 20~30명 정도였다. 이들을 대체로 일자리를 구하려고 대도시를 옮겨 다니며 살았던 한인 1세대들이었지만, 스페인어를 어느 정도 익혔던 1.5세대도 일부 포함되었다. 대부분 시계를 팔거나 구멍 가게를 여는 등 자영업에 종사하였는데, 다른 지역으로 나가 인삼이나 화장품 등을 파는 행상을 하기도 하여, 한인 사회의 동향은 매우 유동적이었다.
1920년 전후에 들어서 유카탄(Yucatán)에 살던 소수의 한인들이 멕시코시티로 이주하였다. 특히 신부감을 찾거나 미국 유학의 꿈을 가졌던이들도 멕시코시티로 옮겨 오면서, 1926년 경에 멕시코시티의 한인은 50여 명으로 늘었다. 당시 멕시코시티에서 시계 가게를 운영하였던 이순녀는 경제적으로 가장 먼저 성공하여 묵경지방회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또한유학생의 한 명이었던 황보영주(皇甫永周, 1895~1959)는 묵경지방회와 묵경한인청년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묵경한인청년회 회가(會歌)를 작사하기도 하였다. 1927년의 묵경지방회 임원 명단을 보면, 회장은 이순녀가 맡았고, 부회장은 김상옥, 총무는 이경재, 서기는 황보영주, 대외 담당은 한종원(韓宗源) 등이 각각 담당하였다. 그 뒤 1928년 2월 22일에 묵경한인청년회가 설립되었는데, 김익주(金益周, 1873~1955)의 사회로 열린 모임에서는 서윤이 회장을 맡았고, 총무에는 김동필, 서기에는 이순녀, 회계에는 김홍식 등이 선임되었다. 이순녀는『신한민보(新韓民報)』3월 29일자 4면에「묵경 한인청년회 기성을 축하함」이라는 글을 실어 청년회의 조직을 널리 알렸다.
1930년대 말에 멕시코시티에 거주하는 한인은 100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회장으로는 1930년에 이경재, 1931년에 이성도, 1932년에 이용순, 1933년에 황보영주, 1934년에 박경선, 1935년에 김수권(金守權) 등이 맡았고, 1937년에 묵경한인청년회 회장은 이동휘가 담당하였다. 그 뒤 묵경지방회의 활동은 지지부진하였다가, 1941년에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 뒤, 하와이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의 독립 투쟁이 벌어지자, 한인회장 이순녀를 중심으로 한종원, 황보영주 등이 오랜 기간 동안 폐쇄되었던 묵경지방회를 다시 일으켰다. 그러나 전반적인 활동은 여전히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여, 1950년대에 묵경한인청년회는 해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청년회는 멕시코 한인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던 단체로, 한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20년대에 멕시코로 이민을 온 청년들을 중심으로 1930년대 말까지 줄곧 큰 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