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에서는 ‘호세 한(Jose Hahn)’으로 불렸다. 멕시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서 활동하면서 한인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멕시코로 돌아갔다.
1905년에 멕시코 유카탄(Yucatán) 지역으로 이민을 가서 진성국어학교(進成國語學校)를 다녔다. 그 뒤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Mérida地方會)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에는 멕시코시티[墨京]로 이주하여 이인녀와 함께 신학교에서 공부하였지만, 병으로 인해 그만두고 메리다로 돌아왔다. 1922년에는 메리다지방회 외교원을 지냈고, 그 뒤에는 교육위원을 맡아서 한인 2세들을 교육하는 데 전념하였다. 1941년 5월에 멕시코시티로 옮긴뒤 묵경(墨京)지방회 선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태평양전쟁 당시에 한인의 안전보호와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한편 이순녀, 황보영주(皇甫永周, 1895∼1959) 등과 함께 오랜 시간 동안 폐쇄되었던 묵경지방회를 재건하였다. 1941년 12월 20일에 발행된 멕시코시티의 3대 일간지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 선전과 한국의 독립운동, 멕시코 한인들의 입장을 게재하였다. 특히 현지 신문인『노베다데스』에는「재묵 한인은 전 멕시코의 은혜를 갚자」는 제목의 기사를 실어 한인의 신변 안전은 물론 멕시코 정부와의 외교 통로를 더욱 돈독히 하였다.
1942년 7월 17일에 묵경지방회 집행위원장 이순녀와 함께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8월 29일에 묵경지방회 회관에서 ‘8·29 현기식(懸旗式)’을 거행하였다. 당시식장에는 국내외 인사 60여 명이 참석하였는데, 이순녀와 함께 긴 칼을 든 채 좌우에 서 있었고, 총무 이건세와 청년회 서기 윤달순 등은 각각 태극기와 멕시코 국기를 들고서 입장하였다고 전한다.
그 뒤 멕시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서, 베라크루스(Veracruz)의 할라발대학과 멕시코국립대학교 등에서 역사학 교수를 지냈다. 1949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인 김동성(金東成)과 함께 친선사절로 활동하였으며, 1955년 12월 11일에 귀국하여 한국외국어대학 서반아어과 주임교수를 맡았다. 1956년에 주미대사 양유찬(梁裕燦)의 수행원으로 남미 20여 개국을 탐방한 뒤, 1960년 6월 17일∼1961년 1월 19일에 한국외국어대학 학장 서리를 지냈다가 멕시코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