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민간에서 공연 활동을 벌였던 아류 연희집단의 중 하나.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서 연희 수요가 많아졌고 이에 대한 공급 양상도 다양했다. 조선 후기 민간의 연희 집단 가운데, 학습, 조직의 운영, 개성적 갈래 및 창조적 레퍼토리를 만들어내는 능력 등을 모두 갖춘 경우는 산대패, 광대패, 사당패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상의 집단들은 오랜 전통과 학습 프로그램, 전형적 레퍼토리를 통해 창조적 연희집단으로서의 자기 정체를 사회적으로 확고하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산대패는 궁중의 연희 및 이를 기반으로 한 각종 민간연희, 탈놀음 등을 담당했고, 광대패는 각 지역의 음악을 기반으로 광대소리, 줄타기, 춤 및 각종 기악과 기예 등을 선보임으로써, 그리고 사당패는 사찰과 공생관계를 맺으면서 선소리 산타령과 소고춤 등으로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이들 외에도 다른 연희집단들이 있었는데, 그 경우는 대부분 산대패, 창우집단, 사당패의 기예 중 한 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강화하거나 모방했고, 집단적 학습 전통이나 조직 운영이 체계적이었다고 보기 어렵고 규모 역시 작았다. 풍각쟁이패, 솟대패, 초라니패, 각설이패, 취승, 곽독 등이 대표적이다. 풍각쟁이는 광대패 소속의 고인[工人]즉 기악연주자들이 연주하는 악기 중 일부를 소규모로 들고 다니며 주로 중소규모 장시 주변에서 연주하는 부류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레퍼토리는 창우집단의 공인과 반드시 같지는 않고, 풍각쟁이용 음악을 따로 연주했다. 대표적인 풍각쟁이 가락은 ‘니나니가락’으로 알려져 있다.
신재효의 「박흥부가」에 묘사된 풍각쟁이패는 네 번째 박을 탈 때 초라니패, 각설이패 등 여타 아류 연희패와 함께 등장한다. 이에 의하면, 풍장쟁이패는 가야금, 퉁소, 해금을 들고 합주하는데, 정현석의 『교방가요』에 의하면 풍각쟁이는 “단소를 들고 구걸하러 다닌다”라고 했고, 최영년의 『해동죽지』에는, “풍각쟁이는 병을 앓았던 자들이 해금, 퉁소를 배워 무리를 만들어 시장에서 행걸했는데 연주는 곡소리나 하소연 같이 애절하여 듣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돈을 던져 도와주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다.
단소·퉁소·해금 등으로 민간의 소박한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는 연희패로 광대패 혹은 창우집단의 아류집단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