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항일 음악가이자 남도 음악의 명인이다. 타고난 음악성을 적극적으로 계발하면서 활동했고, 이를 기반으로 음악계와 당대 사회 내에서 지도력을 발휘했다. 항일 음악인이자 월북 음악인 중 하나였다. 월북 이후 북한 음악계의 지주이자 북한 사회의 거목으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올랐다.
안기옥은 1894년 전남 나주군 남평리에서 태어나 1974년 양강도 혜산에서 사망했다.
안기옥은 꽹가리와 피리로 명성을 떨쳤던 아버지 안영길의 영향을 받았고, 1904년 이후 김달진과 한숙구, 김창조 등에게 가야금, 거문고, 아쟁, 장고, 꽹가리를, 1915년에 백낙준에게 거문고를 사사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징역을 살았고, 1926년 일본인 위안공연을 거부하여 구류당한 바 있다. 1929년 일축의 음반에 산조 녹음을 남겼고, 1930년부터 목포에서 협률단을 조직했으며, 1936년에는 함흥에 권번을 조직했다. 1940년에 상경하여 창극단을 조직하여 일본에 있는 큐슈, 오사카 등지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상대로 순회공연을 벌였다.
1945년 서울에서 창극단을 조직했고, 1946년부터 평양에서 조선고전악연구소 초대 소장과 협률단 단장, 국립고전예술극장 총장을 거치면서 북한의 민족기악 및 창극 공연 및 창작 활동을 주도했다. 창극 「배뱅이」를 만들었으며, 민족관현악합주 「조국산천」, 민족기악중주 「새봄」 등을 작곡·연주했다. 제자 정남희와 함께 『가야금교칙본』(1958)을 집필했고, 이외에도 『장고연주법』을 저술했다. 사망 후 북한 음악가로서는 이례적으로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가 벌어졌다.
안기옥의 제자로 가장 출중한 제자는 정남희였다. 정남희는 1950년에 월북하여 안기옥과 함께 북한에서 남도음악과 민족음악의 진작에 크게 공헌했다.
1994년 평양에서 안기옥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