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음악사에서 손꼽히는 다재다능했던 음악가. 가야금, 거문고, 대금의 명인. 가야금 산조의 창작, 창극 기획 · 작창 및 주연, 신민요 창작, 가야금 병창, 무용 반주, 장고 명인, 영화배우, 음악 교육자, 민요연구가, 공훈배우, 인민배우 등 다방면으로 공헌했던 예술가.
1905년 전남 나주 출생.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분단 등의 격변기를 타고난 음악성과 성실로 관통했고, 만년에는 북한에서 연로보장을 받았다. 1988년 함경북도 선봉군에서 사망했다.
안기옥의 수제자로 10대부터 전문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초년부터 27세까지 전남 여수에서 활동했다. 함흥으로 이주하여 1935년까지 있었고, 1935년에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에 입문했고, 이사가 되었다. 재경 남도음악인의 전문단체였던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창극 기획을 주도했고, 뛰어난 외모와 음악성으로 주연을 맡았고 「유충렬전」에서는 영화배우로도 활약했다. 해방 후 국악원(대한국악원)의 창작 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전쟁 기간에 월북하였다. 월북 이후 국립민족예술단에 소속해 있으면서 가야금 독주자, 장구 및 무용반주자로 명성을 날렸다. 그가 남긴 장구 연주는 당대 최고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평가된다. 1952년에 공훈배우, 1959년에 인민배우가 되었으며, 1970년대부터는 연로보장을 받고 음악가동맹의 민요연구실에서 연구 사업에 종사했다. 안기옥과 함께 『가야금교칙본』(1958)을 집필했다.
정남희는 1935년 상경 전후로 다수의 음반에 녹음을 남기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진 음악가가 되었다. 그는 특히 가야금 산조, 병창 부분에서 다수의 명반을 남겼다. 당시 다른 가야금 연주자와 달리 가야금 산조 전바탕을 두 차례나 녹음하는 등 산조 부문에서 뛰어난 역량을 인정받았다. 그의 산조 녹음 음반은 유성기 음반 중의 명반으로 평가된다. 그의 산조는 남한의 김윤덕에게 계승되었는데, 김윤덕은 그의 산조를 더욱 발전시켜 1968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가야금 병창 및 산조의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월북 후 정남희는 남한의 김윤덕에게 계승된 산조와 달리 그의 산조의 구조를 대폭 수정했다. 북한에 전하는 그의 산조는 남한에 남아있는 그의 유성기 음반의 산조 혹은 김윤덕이 전승한 산조와 완전히 다르다. 이 외에도 그의 창조적 역량은 월북 이후로도 꾸준히 발휘되고 확장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2년에 공훈배우, 1959년에 인민배우가 되었고 1970년 연로보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