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월 12·13일 밤에 인천 가무기좌(가부키자(歌舞技座):1905년 일본인에 의해 인천에 건립된 일본식 공연극장. 1930년 화재로 소실됨)에서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 1928년 2월 10일 풍류객과 판소리 명창들에 의해 창립된 음악단체. 1941년에 조직된 친일단체인 조선음악협회와는 별개) 인천지부 주최·동아일보 인천지부 후원으로 경인연합 명창명기 음악 대연주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동아일보의 기록에 의하면, 본 음악회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고 한다. 입장권을 인쇄하기도 전에 미리 구매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공연 당일은 인천시의 모든 인파가 공연장으로 몰려들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출연 음악가는 해금의 명인 지용구(池龍九), 대금의 명인 방용현(方龍鉉), 판소리의 명인 이동백(李東伯)·조학진(趙學珍), 5세 천재음악소녀 조성희와 그 밖의 경성·인천 지역의 명창·명기들이었다. 연주된 곡목은 이동백의 어사출도, 조학진의 화용도·적벽대전, 박녹주의 춘향가, 하농주의 화도타령 등이었다. 연주회의 입장료는 1등석에 1원, 2등석에 70전, 소아는 반액이었고, 13일 공연은 동아일보 독자에 한하여 1원을 80전으로, 70전을 50전으로 우대해 주었다.
경인연합명창음악연주회는 일제강점기 절멸의 위기를 맞은 조선음악을 부활시키고자 설립된 조선음악협회의 주최로 개최되어, 경인 지역의 명창·명기가 총출동한 가운데 국악을 통해 지역민의 열렬한 단합과 호응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음악사적 의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