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치와와(Chihuahua)에서 살면서 국민회(國民會) 메리다지방회(Mérida地方會)를 이어 치와와지방회를 설립하였다.
1905년에 멕시코의 유카탄(Yucatán)으로 이민을 간 한인들은 에네켄(Henequén) 농장에서 일을 하였다. 이들의 상황은 외부와 연락이 끊어져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08년 9월에 당시 미국 텍사스주와 멕시코 국경 도시인 치와와에 살던 채등진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고 있던 중국 신문인 『중서일보(中西日報)』에 편지를 보내어 멕시코 한인들의 소식을 전하였다. 그 뒤 편지는 다시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共立協會)에 보내져서 『공립신보(共立新報)』에 실렸다.
1909년 5월에 유카탄의 메리다에서 메리다지방회가 설립된 뒤, 멕시코 곳곳에 흩어져 살던 한인들은 각 지역에서 지방회를 설립하였다. 당시 치와와에서도 유카탄 이외의 지역으로는 처음으로 지방회가 설립되었고, 곧 1910년 4월에 채등진은 국민회 치와와경찰소를 설립하였다. 경찰원과 서기는 채등진이 맡았고, 재무는 설종석, 총무는 황두용, 구제원은 이경재, 사찰은 김영하, 간사는 김봉학 등이 임명되었다. 채등진은 5월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에 청원하여 지방회로 정식 인준을 받았다. 임원에는 회장 채등진, 부회장 이성로, 총무 설종석, 서기 황두용, 재무 이인여, 학무원 이경재, 법무원 현흥순, 구제원 김봉학, 외교원 박경운, 사찰 이강재, 평의원 현홍순·김영환·설종석 등이 선출되었다.
1910년에 멕시코 혁명으로 인해서 교통이 막히고 여러 상황이 혼란스럽게 되자, 한인들이 흩어져 치와와지방회는 해산되었다. 지방회 회원들은 대체로 멕시코 북부의 소노라(Sonora) 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1911년 2월에 총무 설종석을 보내어 지방회를 다시 설립하였지만, 8월에 소노라지방회는 메리다지방회에 합해졌다.
멕시코 혁명 때문에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던 치와와지방회 회원들의 소식은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채등진에 대한 소식이나 정보 역시 알려져 있는 것이 없다. 채등진은 아마도 멕시코 혁명 과정에서 변고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