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7년(영조 33) 영조의 명을 받아 시작된『여지도서(輿地圖書)』의 편찬 사업은 각 고을에서 작성하여 올려 보낸 읍지를 중앙에서 재편집하여 1765년(영조 42) 경에 완성되었다.『여지도서』는 중앙 주도로 이루어진 전국 고을 지리지이기 때문에 전국 모든 고을의 항목 구성이 거의 동일하게 편제되었는데, 이후의 읍지(邑誌), 도지(道誌), 전국지리지의 편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768년(영조 44) 경에 편찬된『대구읍지』역시『여지도서』에 수록된 대구읍지의 영향을 받아 항목의 구성이 거의 비슷하다.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10년 1월 20일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 대구의 단독 읍지는 중앙 정부의 전국지리지 편찬 경향과 궤를 같이하여 1697년(숙종 23), 1757년(영조 35) 2차에 걸쳐 편찬되었다. 하지만 이들 읍지가 18세기 중반 대구의 정치적,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편찬된 것이 바로 1768년(영조 44) 경의『대구읍지』다.
1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책의 크기는 세로 33.5㎝, 가로 22.2㎝이다. 사주쌍변(四周雙邊)이며, 반곽(半郭)의 크기는 세로 24.6㎝, 가로 16.2㎝이다.
읍지의 항목 순서는 지도(地圖)-건치 연혁(建置沿革)-군명(郡名)-관직(官職)-성씨(姓氏)-산천(山川)-풍속(風俗)-방리(坊里)-호구(戶口)-전부(田賦)-군액(軍額)-성지(城池)-창고(倉庫)-관방(關防)-진보(鎭堡)-봉수(烽燧)-학교(學校)-단묘(壇廟)-능묘(陵墓)-불우(佛宇)-궁실(宮室)-누정(樓亭)-도로(道路)-교량(橋梁)-도서(島嶼)-제언(堤堰)-장시(場市)-역원(驛院)-목장(牧場)-형승(形勝)-고적(古蹟)-토산(土産)-진공(進貢)-봉름(俸廩)-환적(宦蹟)-과거(科擧)-인물(人物)-제영(題詠)-비판(碑版)-책판(冊板)-추록(追錄)으로 되어 있다.
『여지도서』에 수록된 대구읍지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흔적은 첫째, 장시(場市)와 추록(追錄)이 첨가된 것을 제외하면 항목의 구성이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고 둘째, 대구에는 없는 관방, 진보, 도서의 항목까지 설정했다는 점이다. 하지만『여지도서』처럼 전국지리지의 일부가 아니라 개별 읍지로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항목에서 대구 지역의 사회적, 정치적 여러 욕구를 수록하고 있어 내용이 훨씬 많고 자세해졌다.
16세기 이후 사찬(私撰) 읍지의 유행과『여지도서』라는 관찬(官撰) 읍지 편찬의 경험이 결합되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개별 읍지 중의 하나다. 또한 18세기 중후반 대구지역의 사회적, 정치적 현실이 풍부하게 담겨 있고, 항목의 구성과 내용 서술의 방식이 1832년(순조 32) 경의 대구 읍지에 계승되고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사회 · 정치사 및 지리지 변천사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