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4년(현종 15)에 벨기에의 예수회 선교사 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한자 이름 南懷仁, 1623∼1688)가 중국의 북경(北京)에서 간행한 목판본 세계지도인 『곤여전도(坤輿全圖)』를 모본(母本)으로 하여 채색으로 필사한 세계지도다. 필사자와 정확한 제작 연도는 알 수 없으며, 18세기에 우리나라에서 필사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부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12년 5월 17일에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721년(경종 1) 임금의 동생인 훗날의 영조를 세제(世弟, 왕위 계승자)로 세우고 이를 청나라에 알려 책봉을 받기 위한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를 보냈다. 이때 유척기(兪拓基, 1691∼1767)가 사행(使行)의 일지를 기록하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북경에 다녀오면서 페르비스트가 간행한 『곤여전도』를 구해왔다.
페르비스트의 『곤여전도』는 8폭 병풍의 대형 세계지도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유입되기가 쉽지 않았다. 부산박물관 소장의 『곤여전도』는 첫째, 원본 수입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둘째, 감상의 대상으로서 예술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비단 위에 채색으로 옮겨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8폭 병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폭의 크기는 가로 196.0㎝ 세로 48.0㎝이다.
‘곤여(坤輿)’는 큰 땅[大地]을 가리키는 용어이며, 점차 의미가 확장되어 지구(地球)를 지칭하게 되었다. 페르비스트는 1672년(현종 13) 그림이 함께 수록된 세계지리지인 『곤여도설(坤輿圖說)』을 편찬하였고, 2년 후인 1674년(현종 15)에 『곤여도설』과 함께 비교하며 이용할 수 있는 세계지도인 『곤여전도』를 제작했다. 지도 위에 표기된 지명의 대다수는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Matteo Ricci, 1522∼1610, 한자 이름 利瑪竇)의 세계지도를 따랐고, 마테오리치의 세계지도처럼 중국이 지도의 가운데에 위치하도록 그렸다.
그러나 마테오리치의 세계지도와 달리 첫째, 동반구와 서반구를 분리하여 원 위에 그렸고 둘째, 여백의 주기에 구체적인 지리 지식과 관련된 내용들을 주로 써넣었으며 셋째, 서양에서 제작된 세계지도처럼 남극대륙에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다양한 동물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북유럽과 남아메리카의 내륙, 오세아니아 대륙 등 마테오리치 이후 개선된 서양의 탐험과 측량 성과가 반영되어 더 정확해졌지만 북아메리카의 서북부, 동북아시아 등에서는 여전히 부정확한 측면이 지속되었다. 또한 아프리카 내륙의 하천 유로가 실제와 전혀 다르게 그려지는 등 서양인들이 17세기까지는 내륙이 아닌 해안선 위주로만 탐험했던 결과가 담겨 있다.
18세기의 조선에서도 서양의 세계지도 지식에 대해 적극적으로 인식하려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역사 자료의 가치, 소장자의 감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원본의 흑백이 아니라 다양한 채색으로 필사한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