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국가 지정 사적.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해 목 대신 베어갔던 조선인 약 2만 명의 귀와 코를 묻은 무덤이다. 무덤 위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만물의 구성요소인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을 상징해서 쌓아올린 고린토[五輪塔]라 불리는 석탑이 세워져 있고, 둘레는 돌로 둘러쳐져 있다. 높이는 약 7.2m, 석탑의 높이는 약 9m, 가로 폭은 약 49m이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 무장들이 부피가 큰 목 대신 가져갔던 것으로 본래 이름은 코무덤[鼻塚]이었으나 하야시 라잔[林羅山]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보(豊臣秀吉譜)』에서 코를 자른 것은 야만적이라며 귀무덤이라고 쓴 이래로 귀무덤으로 바뀌었다.
1597년 9월에 축조되었으며,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인 사이쇼 쇼타이[西笑承兌]는 코 공양 법회의 경문에서 ‘명나라와 조선의 전사자들’을 애도한다고 하면서 무덤 축조는 히데요시가 이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긴[慈愍] 결과라고 적었다. 그러나 희생자의 대부분은 비전투원이었기 때문에 이 법회는 허구의 공양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납치되었던 유학자 강항(姜沆)은 히데요시의 자민(慈愍)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에도시대 조선통신사 환영연회가 조선인이총 앞의 호코지[方広寺] 대불 앞에서 거행되었는데,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州]가 진언하고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중개하여 조선인이총에 대나무울타리를 쳤다고 전해진다. 1625년에는 조선통신사 부사 강홍중(姜弘重)이 조선인이총을 방문하였다.
1898년 히데요시 사망 300년 때 대규모 개수가 이루어졌는데 일본 제국주의화의 분위기 속에 히데요시를 국가의 위신을 신장한 인물로 재평가함으로써 조선인이총은 일본 국위 위신의 증표로 여겨졌다.
1915년 황폐해 있는 조선인이총 둘레를 공교롭게도 히데요시를 존경하는 우익 인사 오바타 이와지로[小畑岩次郎]에 의해서 돌 울타리로 둘러치고 무덤을 정비하는 등의 수리가 이루어진 이후, 1968년 4월 12일, 「호코지(方広寺) 석루(石塁) 및 석탑(石塔)」으로서 일본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현재는 매년 10월에 위령제가 행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