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은 양국 간의 신속한 교섭을 위한 통신수단 개설의 필요를 이유로 1882년 말부터 해저전선 부설에 관한 외교적 절충을 조선에 요청해왔다. 조선에서도 필요를 인식했으나, 일본 측이 전선시설을 위한 대지를 무제한 조차(租借)해 줄 것을 요구함으로써 협상이 타결되지 못하고 있었고, 외무독판(外務督辦) 조영하(趙寧夏) 역시 이러한 일본의 요구가 국권침해라 주장하면서 지조기한(地租期限)을 15년으로 할 것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외무독판이 민영목(閔泳穆)으로 교체되면서 양국은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부산까지의 해저전선 부설에 합의하였고, 시공회사는 덴마크의 대북부전신주식회사(大北部電信株式會社)가 맡게 되었다.
조약은 조선측 대표 외무독판 민영목, 협판 홍영식(洪英植)과 일본측 대표 변리공사(辨理公使)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 사이에 체결되었다. 조약 내용은 일본측 제안으로 전선의 지조기한을 25년간으로 하여 지조는 면제하고, 전선 업무는 일본 정부가 담당하며, 준공 25년 내에 이 전선과 경쟁하게 되는 전선 부설을 제3국에 승인해줄 수 없다는 것 등이다.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도 일본에 대항해 청나라와의 근대적 통신시설의 가설을 조선 정부에 요구하였다. 조·청 양국 간의 교섭결과 1885년 7월 조청전선조약(朝淸電線條約)을 체결하고, 청국전선총국(淸國電線總局)이 공사비 10만 냥을 차관해 인천-서울-의주간의 전선을 설치함으로써 한성과 북경이 전선으로 연결되었다.
조청간의 관계가 긴밀해지게 되자, 이번에는 일본이 조청전선조약이 조일해저전선조약 제2조와 제3조의 내용을 위배한다고 항의하였다. 즉, 의주 전선을 통해 조선의 공사간의 전보를 내보낼 수 없으며, 만일 내보낸다면 그로 인해 입은 일본 측 손해를 배상해주어야 하며, 부산선은 일본 또는 덴마크 대북부전신주식회사가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항의가 있은 뒤 1885년 12월 21일에 「조일해저전선부설조관속약(朝日海底電線敷設條款續約)」이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김윤식(金允植)과 일본 대리공사(代理公使) 다카히라 고고로(高平小五郎) 사이에 체결되었다. 이 속약은 전 4조로 되어 있다. 의주선을 부산선과 연결해 해외전신을 수발하고, 양선의 해외 전신비는 동률로 할 것이며, 조일해저전선의 경우와 같이 부산선을 이용하는 일본의 관보통신도 25년간 절반 가격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근대적 통신시설 가설을 위해 맺은 조약으로서, 이를 통하여 일본이 조선의 통신망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