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의용병 ()

국방
단체
6·25전쟁 당시 조국방위를 위해 참전한 642명의 재일동포 청년들로 구성된 의용부대.
이칭
이칭
재일학도의용군, 재일학도의용대,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재일동포북송저지특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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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6·25전쟁 당시 조국방위를 위해 참전한 642명의 재일동포 청년들로 구성된 의용부대.
개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재일동포 청년들이 조국방위를 위해 의용군지원병 모집을 결의한 후,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통역지원을 위해 미8군에 편입되어 참전한 의용부대이다.

연원 및 변천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학생을 중심으로 한 재일동포 청년들이 조국방위를 위해 민단중앙사무소에 모여 의용군지원병 모집을 결의하고 6월 29일에 각지 민단본부에 의용군접수소가 설치되었다. 민단중앙은 주일대표부를 통해 재일동포 청년의 의용병 파견을 협의하였으나 당초 한국정부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결국 유엔군이 준비하던 인천상륙작전에서의 통역과 길안내 요원의 필요에 따른 윌로비(Charles A, Willoughby) 소장의 요청에 부응하는 형태로 미8군에 편입되어 최종적으로 642명이 선발, 참전하였다.

기능과 역할

사격·제식훈련 등 2주간의 단기속성 군사훈련을 마친 재일의용병은 1진 76명이 1950년 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이래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재일의용병은 인천상륙작전, 평양 입성, 압록강 해산진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에 참여했다. 재일의용군은 단일부대로서가 아니라 수십 명 단위로 전국에 흩어져 싸웠기 때문에 이들의 존재는 쉽게 잊혀졌지만, 전쟁 후에도 1959년에 재일동포북송저지특공대를 조직해 일본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642명의 재일의용병 중 52명은 전쟁 중에 사망했고 83명은 행방불명 상태이며, 265명은 미군의 순환배치 방침에 따라 1951년 1월부터 일본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나머지 242명은 1952년 4월 체결된 샌프란시스코조약에 따라 주권을 되찾은 일본이 입국을 거부함으로써 한국에 남게 되었다. 이들은 1952년 4월 부산에서 재일학도의용대(현재의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를 조직, 1953년 서울에 본부를 설치했다. 일본 태생이어서 본적이 없거나, 본적이 말소된 의용병 70여 명의 본적이 ‘종로구 인사동 34’로 된 것은 이 때문이다.

6·25전쟁 당시 사망자 52명의 유해는 한국인 주지가 운영하는 일본 도쿄 부근 사찰(대행사)에 안치되었다가 1963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생존 재일의용병은 1968년에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었다.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에서는 1973년 국립묘지에 ‘재일학도의용군 위령비’를 건립하였고, 1979년에는 최초로 참전한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인천 수봉공원에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탑’을 세웠다.

의의와 평가

6.25 전쟁 당시 해외국민이 조국방위를 위해 참전한 최초의 사례였다는데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在日義勇軍歸還せず:朝鮮戰爭秘史』(金贊汀, 岩波書店, 2007)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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