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한 기업인.
개설
생애
졸업 후 그는 대한제국 인천 세관의 직원모집에 응모하여 1년간 근무하였다. 1902년 하와이 이민을 위해 신설된 유민원(綬民院)의 영어 통역관 모집에 응모하여 합격하였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한인노동자들의 통역관 겸 인솔책임자로 임명받은 김형순은 같은 해에 첫 노동자들과 함께 최초의 이민선을 타고 마우이(Maui)섬의 사탕수수농장에 도착하였다.
김형순은 마우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볼드윈(Baldwin)이라는 지배인 밑에서 6년 동안 통역 일을 하다가, 1909년 통역의 직책을 사임하고 고국에 돌아왔다. 귀국 후 존스 목사의 중매로 당시 이화학당 성악과 출신이었던 한덕세(전북 정읍 출생, Daisy, 1896.12.28-1977.5.5)와 결혼을 하였다.
활동사항
그는 과일 육종전문가(UC Davis 농대 교수)로부터 자두와 복숭아로 개발한 넥타린(Nectarine) 복숭아 특허품의 묘목전매권을 획득하여 신종 18종의 넥타린을 전 미국에 보급하였다. 사업이 확장되면서 김형순은 새로운 동업자로 김호(金乎)를 만나 ‘김형제상회’(Kim Brothers Company)를 새로이 설립하였고, 이들 사업을 통해 번 돈의 상당 부분을 독립운동과 동포사업을 위해 기부하였다.
1929년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미주 본토에서도 1930년 들어 각 지에서 공동회가 조직되어 적극적인 독립운동 지원사업에 나서게 되었다. 중가주에서도 한인공동회(韓人共同會)가 열려 한인사회에 신망이 높았던 김형순이 회장에 선임되었다.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미주 한인사회의 지도력을 인정받은 김형순과 김호는 1940년에 들어서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해방 후에는 사업을 계속하는 한편 1950년 1월 2일 북미국민회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그 후 1960년까지 10년간 대한인국민회 집행위원장을 지냈다. 또한 그는 경기도 평택군 이북면에 ‘꽃동산 애육원’을 설립하여 전쟁 고아들을 돌보았고, 돈이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뒷받침해 주고자 하였다.
1957년 5월 중가주 리들리에서 조국의 재건과 민족의 장래를 위해 그는 김호 · 김원용 등 한인 실업가들과 협의하여 한인재단(Korean Foundation)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1977년 1월 25일 91세로 별세하였으며, 장례식은 대한인국민회장으로 치러졌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미국 속의 한국인』(崔鳳潤, 종로서적, 1983)
-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용, Reedley California, 1959)
- 「미주 한인 최초 백만장자 김형순」(김운하, 『월간 코리언드림』 Vol.4 No.3, 2003.5)
- 「한국 첫 미주 이민단의 지도자 : 김형순 선생의 요약된 생애」(김운하, 『중가주 한인역사의 재조명』, 2003.2.1)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