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황제(光武皇帝: 高宗)의 강제퇴위, 정미조약(丁未條約)의 체결, 군대해산 등 국망적(國亡的) 사태(事態)가 일어나자, 1907년 하와이에서 김익성(金翊成), 박상하(朴相夏) 최병현(崔炳鉉), 조병요(趙炳堯) 등 성공회 계열의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이다.
1907년 9월 20일자 『공립신보(共立新報)』에 실린 「전흥협회 취지서」에 나타난 목적을 보면, “동심합력하여 환란을 서로 구완하며, 교육을 발달케 하여 문명을 진취하며, 충성을 다하여 국권을 회복할 의로 정함”이라고 하였다.
전흥협회는 1908년 9월 기관지로 『전흥신보(電興新報)』제1권 제1호를 발간하였으나, 그 후 기관지를 월보로 발행하면서 『전흥월보(電興月報)』로 제호를 변경하였다. 1908년 3월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의사가 친일외교관 스티븐스(Stevens, D.W.)를 처단한 이후에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미본토의 공립협회는 그 해 11월 사실상 합동에 찬동하였다. 그리고 하와이내에서는 합성협회와 전흥협회의 합동에 대한 압력이 더욱 거세졌다. 이에 1909년 1월 25일 전흥협회와 합성협회가 합동하였고, 전흥협회의 기관지 『전흥월보』는 1909년 2월 대한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관지인 『신한국보』에 합병되었다.
하와이의 성공회계열 사람들은 여전히 복벽주의적(復辟主義的) 성향을 보이면서 공화주의적(共和主義的) 계열의 단체나 운동단체와 마찰을 빚어왔지만, 하와이 한인사회는 공화주의를 중심으로 여러 단체를 통합하여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을 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