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설립되기 이전에 1912년 8월 순행목사(巡行牧師: 지역을 돌아다니며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찾아와 한인들이 예배를 보기 시작했고, 9월 다뉴바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장로교선교부에 연락하여 한인선교부를 설립하고 이치완(李致完) 전도사의 인도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델라노(Delano), 리들리(Reedley), 다뉴바(Dinuba), 팔리어(Parlier) 등의 지역을 통칭해 중가주(中加州: 중부 캘리포니아)라 부른다. 중가주 지역은 미국내 과일 생산지로 유명하다. 한인들은 과일 농사 및 장사를 통해 많은 수익을 올렸으며, 따라서 한인 노동자들의 수가 증가하였다. 다뉴바 지역에 한인들이 증가하면서 한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할 다뉴바한인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1910년 경부터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로 건너오는 한인 노동자들은 다뉴바와 리들리 농장지대로 몰려들었다. 다뉴바 포도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이 증가하자, 1912년 8월 민찬호(閔瓚鎬) 목사 부부가 남장로교 순행목사로 찾아와 설교했고, 이어 한인들과 가까운 스튜워트 부인(Mary Elizabeth Stewart)도 미국인 목사를 대동하고 2주간 머물렀다.
1912년 9월 6일 다뉴바 한인들이 장로교선교부 샌호킨노회(San Joaquin Presbytery)에 한인선교부의 설립을 청원하였다. 샌호킨노회에서 이를 승인하였고, 이치완 전도사의 인도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초기엔 방 2칸 정도의 작은 교회였으나, 교인이 증가하자 1915년 10월 15일 다뉴바 노스 오 스트리트(North O Street)와 사우스 알타 애비뉴(South Alta Ave.)의 교차로에 1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 건물을 건축, 그 해 12월 23일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미국인 린들리(Lindley) 부부의 도움으로 주일학교를 운영하여 한인 어린이들에게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다.
1917년 3월 8일에는 목사실을 건축하였고, 1920년 2월 15일 정식교회로 인가받았다. 한때 교인수가 150명에 달하기도 했고, 최소는 15명 정도였다. 그러다 한인 동포의 급감으로 1958년 2월 4일 교회가 폐쇄되었다.
역대 교역자는 이치완, 홍치범 전도사를 비롯해 라플린, 한승권, 사병순, 이살음, 이기준, 구왕도, 김형태, 김형일, 최중섭 목사 등이 있다.
다뉴바한인장로교회는 중부캘리포니아 지역 한인교회 가운데 가장 먼저 설립된 교회로 이 지역 한인들과 한인교회들의 구심점이었다.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감격하여 다뉴바지역에서 3.1운동 기념식을 통해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한인 아동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데 교회가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각 종 명목의 독립운동 모금에 앞장서서 이를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만주 동포들을 위해 성금을 모으고, 만주에 있는 민족지도자들의 안전을 위한 민중기도회를 개최했다.
1997년경 도시계획에 의거해 새로 도로가 확장되고 다뉴바경찰국이 설립되면서 교회 자체가 헐려버렸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현지 교민과 단체들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교회의 옛터에 기념비를 세우려고 노력하였고, 다뉴바시 당국도 기념부지를 제공하는 등 적극 협조하였다.
2008년 3월 12일 일제하 조국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미주한인을 기리기 위한 ‘이민선조 애국활동 기념비’가 다뉴바한인교회 터와 1920년 3.1절 1주년 기념 퍼레이드가 열렸던 다뉴바 메인스트리트에 각각 건립되었다.
2012년 3월 3일 다뉴바한인교회가 있던 자리에서 3.1절 기념예배와 퍼레이드 행사를 가졌다.
다뉴바한인교회는 미주 독립운동의 요람지로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를 지원하였고, 기독교 예배 뿐만 아니라 3.1운동 기념식 등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각종 행사의 개최, 민족운동 단체의 설립, 만주에 있는 한인 동포들의 구제, 중경 임시정부 지원 등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상호 연결이 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로써 리들리·델라노 한인교회와 함께 미국 중가주지역 한인들의 독립운동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