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출생하였다. 단천 지역 YMCA운동에 참여하였고, 1921년에는 기독청년회연합회 총회에 단천 대표로 참석하였다. 일본 유학 후 1926년 재일 YMCA 부총무로 활동했다. 1928년 일본대학 문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였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원산 YMCA 총무로 활동하며 원산의 사회운동에 관여하였다. 3년제 남자중학교인 ‘원산기독교청년회학관’를 설립하여 무산아동을 위한 야학과 주학부를 개설하고,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난 학생들을 모아 교육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원산 지역 기독교청년회학관 학생들을 선두에서 지휘하였다. 1929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정기대회 수정위원 후보 및 원산 YMCA에서 설립한 원산 협동소비조합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1930년 9월 1일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관동진재 피해동포 제7주년 추도회'가 개최되었을 때 추도사를 낭독했다. 당시 분위기가 가열되자 일본 경찰의 제지를 당하기도 했다.
1931년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의 훈육주임으로 초빙되었다. 그는 학교에서 해박한 지식과 논리로 공산주의와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였기 때문에 경찰당국에 의해 교원자격을 박탈당하고 만주 은진중학교로 옮겨 갔다.
1920년대 후반 “이 때를 아느냐”, “기독교의 인생관” 등의 제목으로 강연회를 하였고, “人種自殺”이란 제목의 금주 강연회도 진행하였다. 1930년대 『기독신보』에 「기독교와 사회주의」, 「종교는 과연 아편인가?」, 「메이데이와 기독교」 등을 연재하였다. 그리고 “유물사상과 유심론”, “천국운동”, “지상천국건설운동” 등의 제목으로 전국을 순회 강연하였다.청년들이 사회주의에 물들어 전도가 어렵게 되었음을 깨닫고 종교적 책임감에 입각하여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해 연구를 시작하였고, 사회주의의 원류가 기독교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종교 아편론’과 같은 몰지각한 사고와 폭력을 중지하라고 촉구하고, 교회에 대해서는 예수의 원래 정신으로 돌아가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며 교계의 타성과 나태를 반성하고 적극적으로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라고 촉구하였다.
1935년 캐나다선교회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종교철학을 전공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 후 뉴욕 등지에서 “John Star Kim”이란 필명으로 문서선교에 힘쓰다가 1978년 1월 28일 뉴욕에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