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기도원 ()

개신교
단체
1947년 4월 5일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 용문산 기슭에 설립된 국내 최초의 개신교 기도원.
이칭
이칭
애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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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용문산기도원은 1947년 4월 5일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 용문산 기슭에 설립된 국내 최초의 개신교 기도원이다. 1947년 나운몽은 용문산에 들어가 ‘애향숙’을 짓고 5명의 숙생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후 애향숙과 구국 기도를 접목시킨 용문산기도원 운동을 시작하였다. 1978년 정부에서 교단 없는 기도원을 철거하려고 하자, 미국 오순절성결교회와 제휴하여 대한예수교오순절성결회(오성)라는 교단을 설립을 하였으나 곧 분리되었다. 2013년 기독교대한감리회에 재단법인 애향숙이 편입되면서 ‘이단’ 시비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졌다.

키워드
정의
1947년 4월 5일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 용문산 기슭에 설립된 국내 최초의 개신교 기도원.
개설

평안북도 박천군 출신인 나운몽(羅雲夢, 1914∼2009) 목사가 1947년 4월 5일 ‘애향숙’이란 이름으로 설립한 기도원으로, 한국 개신교 기도원의 모체이다. 나운몽은 한국전쟁 시기에 입신 · 방언 · 신유 등의 신비 체험을 한 후 용문산을 중심으로 전도 활동에 나섰고, 이를 통해 용문산기도원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연원 및 변천

1914년 나운몽 목사는 젊은 시절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해 번민하여, 불교에 귀의해 승려 생활을 하다가, 다시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1940년 5월 7일 용문산에 입산하여 개인적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해방된 해에 수표감리교회로 옮겨 1946년 장로 임직을 받았다.

나운몽은 1947년 다시 용문산에 들어가 4월 5일 ‘애향숙’이라는 이름을 짓고 5명의 숙생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후 신비체험을 하고 전국 각지에서 부흥회를 주도하였으며, 애향숙과 구국 기도를 접목시킨 용문산기도원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더욱 발전해 나운몽의 3겹줄 전도운동인 부흥 · 문서 · 기도 전도의 열풍도 크게 일어났다.

1955년 기드온고등성경학교 설립, 1956년 기드온신학교와 기드온수도원을 창설하였고, 1961년 문교부로부터 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 1962년 용문산기도원에는 신도 4백여 명 외에 남녀 학생 3백 명을 합쳐 7백여 명이 있었다.

1960년 4 · 19 직후에는 ‘북진통일’을 한다며, 신학생 3백여 명이 김천에서 대전까지 무임승차하는 사건도 발생했고, 1968년 2월 9일에는 용문산기드온신학생 · 수도생 · 수도사 등 400여 명이 십자군전도대회 깃발과 플래카드, 멸공통일이라고 쓴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임진강 자유의 다리를 향해 행진하며 북괴의 만행을 규탄하는 행진을 하다 미군과 충돌하기도 했다.

지나친 신비운동을 막았던 기존 교회들로부터 논란이 벌어져, 1968년 7월 22일 예장(고신) 총회의 경남노회는용문산기도원을 이단으로 결정했고, 이후에도 이단 논쟁 시비는 계속 일어났다.

1978년 정부에서 교단 없는 기도원을 철거하려고 하자 용문산기도원과 교회들은 모두 감리회에 소속되려고 했지만, 나운몽의 제자들은 따로 교단을 만들자고 이를 반대했다. 이후 나운몽은1979년 3월 30일 미국 오순절성결교회와 제휴하여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감독직을 임명받아 귀국하여 대한예수교오순절성결회(오성)라는 교단을 설립하고, 재단법인체를 구성하여 『복음신문』을 발간하였다. 1982년에 미국 국제오순절성결회가 주한 선교사 캠블 목사의 보고에 의해 나운몽 감독을 제명하자, 1982년 10월 4일 오순절성결회 총회에서 캠블의 추방을 결의하여 오순절성결회는 나운몽 목사 측과 캠블 선교사 측으로 양분되었고, 1983년에는 ‘오순절성결회’라는 명칭을 더 이상 사용하지 말라는 처분을 받았다. 이후 나운몽은 다시 한 번 감리회와 접촉해 감리회로 소속시킨다는 구두 약속을 받았으나 인준 과정에서 삼남연회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그는 2009년 11월 26일 향년 9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012년 용문산기도원장 나서영 목사가 감리교 삼남연회와 상의하여 편입이 진행되었다. 2013년 용문산기도원이 속한 재단법인 애향숙이 감리교에서 파송한 이사로 구성되었고, 12월 4일 기독교대한감리회 유지재단에 별도법인(이사장 석준복)으로 편입되어 등기를 마쳤다.

현황

용문산기도원은 793.39㎡[240평] 규모의 대강당 대성전을 비롯하여 88회관, 사무실, 도서관, 성경학교, 신학교, 수도관, 중앙숙, 기념관 등이 있는 애향촌, 그리고 소망촌, 칠성촌, 믿음촌에는 150여 가구가 상주하고 있다. 전국에서 이주해 온 독신자 700명, 학생 600명이 있다. 고등 성경학교에는 현재 300명의 학생이 취학하고 있는데, 2010년 10월 현재 남자 641명, 여자 559명을 배출하였다. 1990년대에는 300여 가구에 1,000여 명이 상주하였고, 전국의 신도 3만여 명이 연중행사로 기도 대집회를 열기도 하였다. 현재 용문산기도원 원장은 나운몽 목사의 장남인 나서영 목사이다.

의의와 평가

한국전쟁 이후 기도원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던 시기에 한국 기도원의 모체인 용문산기도원은 폭발적으로 발전하였고, 기독교의 토착화 작업에 일익을 담당했다. 용문산기도원은 대한수도원, 한얼산기도원 등과 함께 한국교회의 기도원을 대표하였으나 신비주의적 성령론 등의 이유로 기독교 주류 진영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2013년 기독교대한감리회에 편입되면서 ‘이단’ 시비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졌다.

참고문헌

「대한예수교 오순절 성결회와 나운몽씨와 관계천명[수신: 각 교단 본부 및 목사, 발신: 대한예수교 오순절성결회]」(1983.5.24.)
「레온 스튜워드가 나운몽에게 보내는 오순절 성결회 명칭 사용에 관한 편지」(1983.4.25.)
「레온 스튜워트가 나운몽에게 보내는 국제오성 최고 실행이사회에서 결정한 내용에 관한 편지」(1982.12.10.)
『아이굿뉴스』(2014.2.13.)
『크리스천투데이』(2014.2.12.)
『한겨레신문』(2009.11.26.)
『동아일보』(1962.2.3.)
집필자
박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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