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면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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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외리 문양전 일괄 중 산수귀문전
부여 외리 문양전 일괄 중 산수귀문전
공예
개념
벽사의 뜻으로 건축물 또는 공예품에 부수되는 부분에 괴수 얼굴이나 몸의 형상을 나타낸 문양.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귀면문은 벽사의 뜻으로 건축물 또는 공예품에 괴수 얼굴이나 몸의 형상을 나타낸 문양이다. 주술적인 제기, 건축, 고분 등에서 상징적인 그림으로 나타난다. 주로 얼굴 부분을 표현했는데 코를 크게 솟아오르도록 송곳니를 강조하는 형식 등이다. 귀면문은 오래전부터 사용되었으며 시대에 따라 형식과 기법은 변화하였다. 삼국시대에 귀면문은 기와에서 많이 발견된다. 고려·조선시대에 귀면문은 가면과 연관된 형태로 표현되다가 괴이한 사람 얼굴에 가까워진다. 귀면문은 기와뿐만 아니라 벽화고분이나 토기 등 다양한 공예품에서도 사용되었다.

목차
정의
벽사의 뜻으로 건축물 또는 공예품에 부수되는 부분에 괴수 얼굴이나 몸의 형상을 나타낸 문양.
내용

주술적인 제기(祭器)의 장식의장이나 건축 또는 고분 등에서 상징적인 그림으로 많이 나타난다. 표현형식은 귀면이라는 말 그대로 얼굴부분을 주로 하였으나, 때로는 전지(前肢) 혹은 사지(四肢)까지도 표현하는 수가 있다.

얼굴만을 표현할 때에는 눈 · 코 · 입이 표현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눈은 반구형(半球形)으로 융기되었고, 코는 중앙부에서 넓은 자리를 차지하면서 높이 솟아 큰 콧구멍이 표현되었으며, 입은 크게 벌려서 커다란 치아를 드러냈는데, 특히 아래위에 깊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표현하였다. 이 밖에도 귀 · 수염 · 머리카락 등을 얼굴 주위에 나타내는 수도 있고, 때로는 눈 위 좌우에 큰 뿔을 첨가하는 수도 있다. 사지를 함께 표현할 때에는 자연히 몸도 함께 표현하지만, 전지만 표현할 때에는 몸은 일부만 나타내거나 얼굴 하부 좌우에 발을 붙여서 몸의 표현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귀면문의 기원은 중국의 은나라 이후 청동기의 문양으로 시문된 도철문(饕餮文)에 있다. 그러나 귀면문이라는 개념에 포함될 수 있는 형식이 성립된 시기는 한대(漢代)로 생각된다. 도철문은 크게 뜬 눈과 그 위의 거대한 뿔, 그리고 분명하지는 않으나 치아가 보이는 입이 문양의 주된 부분이다. 이 밖에 전지 혹은 사지에 꼬리까지 표현하는 수가 있기는 하나 매우 드물고, 이러한 문양은 좌우대칭인 점이 또한 특징이다.

이 도철문과 우리 나라의 귀면문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눈 · 코 · 입 · 뿔 등을 강조한 점과 좌우대칭으로 표현한 점 등 기본구도가 일치하고 있다. 후한대에 이르게 되면 화상석(畫像石)에 도철문에서 크게 변화된 귀면문에 가까운 형태의 조각이 있는가 하면, 원문(猿文)이라고도 하는 귀면문에 가까운 와당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북위(北魏) 이래의 석굴조각에서는 본격적인 귀면문의 이용도가 높아진다.

(1) 고구려

우리 나라에서도 귀면문은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이미 통구지방에서 고구려의 귀면문 수막새기와가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귀면문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온 것으로 보이는데, 막새기와에서 가장 먼저 이용된 듯하다. 귀면문이 있는 고구려 막새기와는 수막새 · 반와당(半瓦當) · 내림새막새 · 부고 등 종류가 많으며, 귀면 면상(面相)의 변화 또는 다른 문양과의 복합배치 등 변화도 다양하다. 귀면문반와당 · 귀면부고 등은 평양 부근 이외에서는 발견되지 않아 우리 나라의 막새기와로는 특이한 존재라고 하겠다.

수막새의 귀면문은 두 가지 형식으로 표현된다. 하나는 원형의 공간 전체를 귀면으로 채워서 눈 · 코 · 입을 강조한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사면의 귀면과 네 잎의 연꽃잎을 교대로 배치한 형식이다. 이때의 귀면은 공간의 축소로 인해서 약식화되었으나, 기본형은 잃지 않고 있다.

반와당의 귀면은 전신을 표현한 점이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을 향하여 중앙 상부에 얼굴을 배치하고, 그 밑으로 가슴과 배를 표현하였으며, 사지를 크게 벌려서 좌우의 공간을 메웠다. 얼굴에는 귀면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네 발에는 길고 날카로운 발톱이 있다. 이러한 형상은 한대 원와당(圓瓦當)이나 정원현(定遠縣) 한묘(漢墓) 화상석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원상(猿像)이라고 하는 것과 매우 비슷한 형식이다.

귀면문부고의 귀면문은 형태가 역사다리꼴이기 때문에 안면만으로 되어 있으나, 수막새기와가 입체적이고 변화가 많음에 비하여 종류도 적을 뿐 아니라, 표현형식도 단순하여 융기선으로 표현하였다. 중앙부 밑에 폭의 반을 차지할 만큼 입을 크게 벌렸는데, 그 안에 치아가 있고 입 위에 큰 코와 그 좌우에 비교적 작은 눈이 있으며, 입 주위에 수염을 표현하였다. 내림새막새기와 또한 발견된 예가 많지 않으나 기본형은 동일하다. 다만 공간이 넓은 관계로 귀면의 특징을 살리는 데 효과를 내고 있다.

(2) 백 제

백제의 수막새기와 · 암막새기와 · 내림새막새기와 등에 귀면문이 있는 예는 발견되지 않았고, 다만 서까래막새기와로 보이는 방형 기와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가탑리와 경룡사지(驚龍寺址)에서 발견되었다.

가탑리의 것은 추상화된 형식으로, 밑에는 크게 벌린 입에 문치(門齒) 3개와 좌우에 견치(犬齒)가 있고, 중앙부에 큰 코가 있어 윗부분은 둥글게 융기되었다. 상단 좌우에는 둥근 눈이 크게 표현되었고, 입 밑에는 수염이 있다. 코의 중앙부에 네모난 구멍이 있는 점으로 보아 서까래기와로 추정된다. 경룡사지의 것은 상반부가 결실되었으나 중앙에 둥근 구멍이 있고, 하반부는 입으로 차 있으며, 둥근 구멍 위 좌우에 큰 눈이 있는 일반적인 형식이다.

이와 같이 백제시대의 막새기와에 귀면문을 넣은 예는 거의 없으나, 부여군 규암면 외리에서 출토된 문양전에서는 8종류 가운데 2종류나 귀면문을 넣었다. 이 귀면문전(鬼面文塼)은 모두 전신상으로 얼굴에서는 귀면의 특색이 충분히 발휘되었으며, 특히 입이 크고 입 주위에 수염을 굵게 표현하였다. 상체는 장대하고 두 팔을 활짝 벌려서 공격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하체는 빈약하고 두 발은 서 있는 형상이다. 몸 전체로 보아서는 균형이 잡히지 않았지만, 그로 인하여 오히려 귀문의 괴이성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밖에도 부여읍에서 용도불명의 청동방형귀면(靑銅方形鬼面)이 발견되었다. 전체적으로 귀면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으나 두 눈이 뚫려 있고 각 모서리 가까이에 못구멍이 있다.

(3) 신 라

신라시대의 기와에서는 귀면문은 볼 수 없으나,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귀면기와가 유행하는데, 특히 내림새막새기와는 거의 귀면 일색이다. 기와형태의 다양함은 물론, 눈 · 코 · 입 · 치아 · 수염 등 귀면의 기본형은 공통되나 표현수법은 실로 변화가 많다. 고구려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나 기법이 나타나, 형태에서 장방형 입방체의 한 면에 귀면을 조각하고 상단 좌우에 작은 돌기를 붙인 형식이 있다. 이것이 건축물의 어느 위치에 썼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 고분벽화에 이와 비슷한 공간에 귀면을 그린 부분이 건축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어 많은 참고가 된다.

표현형식에서는 거의 모두 큰 뿔을 나타냈고, 전지를 첨가한 예도 있으며, 녹유를 사용한 예가 상당수 발견되고 있다. 이와 같은 내림새막새기와에 비하면 수막새 · 암막새 등의 사용례는 매우 빈약하다. 수막새는 역시 안면 위주의 표현이고, 때로는 연판(蓮瓣) · 귀갑(龜甲) 등을 주연에 돌리기도 하여, 귀면만을 표현한 데 비하면 표출의욕의 약화가 나타날 뿐 아니라 귀면의 표현수법도 기냘퍼지고 있다.

요컨대, 신라시대의 귀면문은 내림새막새기와에서 진면목을 발휘하였을 뿐, 다른 종류의 기와에는 그다지 많이 이용되지 않았다. 신라시대의 전(塼)에 이용된 귀면문은 볼 수 없고, 엄격히 말해서 귀면문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경주 사천왕사지 출토 사천왕상의 귀형에서 그 유형을 볼 수 있을 뿐이다.

(4) 고려 · 조선시대

고려시대에도 귀면문은 계속 사용되나, 내림새막새기와에서는 입술이 두꺼워지고 혀를 내밀기도 하며, 공간을 불필요하게 융기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은 입체감을 내는 데 효과적이기도 하지만, 수막새 · 암막새 등의 귀면은 융기선으로 표현하여 입체감이 전혀 없으며, 양식적으로도 입이 작아지고 공간을 많이 남겨서 위압감을 느끼기보다는 가면을 연상하게 한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시대가 되면 더욱 심해져서 귀면을 막새기와에 이용한다는 타성만 남고, 귀면은 괴이한 인면(人面)에 가까워진다.

회화에 귀면문이 표현된 예는 통구 사신총(四神塚), 통구 서강(西崗) 제17호분,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 등의 벽화고분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은 정면상과 반측면상이며, 주로 입을 크게 표현하였다. 눈과 코는 와전에 비하면 현저히 작아졌으나 송곳니가 있는 점, 뿔이 없는 점 등 공통점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통구 사신총의 경우 눈꺼풀이 만곡된 점은 와전의 경우와 매우 비슷하며, 혀를 길게 내밀고 있는 점은 고려시대 내림새막새기와의 형식과 상통하고 있다. 또, 천왕지신총에서는 현실 8각받침 위에서 원형 돔(dome)을 형성하기 위하여 8각 각 모서리에 붙어 있는 첨차머리와 천장의 십자형 반원 보의 안쪽면 하단에 각각 정면상의 귀면을 그렸다.

포수의 용례로는 통일신라시대 고분의 석비(石扉)에서 현저한 형태를 볼 수 있다. 경주 충효동 제10호분, 경주 황오동 쌍상총(雙床塚) 등의 석비에 달렸던 문고리의 귀면문 사구(舍具)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중 귀면의 특징을 살려 큰 입으로 고리를 물고 있는 예도 있지만, 고구려시대의 와당에 비하면 입 · 코 · 눈의 강조가 현저히 퇴화되었다. 특히 충효동 제10호분 포수의 경우 선각으로 표현하여 입체감이 전혀 없다.

고려시대 토기 또는 철유향로(鐵釉香爐)에는 귀면의 귀가 붙어 있는 예가 있어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표현되었으나, 코가 커지고 입이 작아지는 등, 고려시대의 도자기에서 다음 시대의 변화현상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용기에 귀면을 장식하는 의미의 연원은 포수에서 전화(轉化)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밖에도 각종 공예품에 귀면을 이용한 예가 있다. 경주 식리총(飾履塚) 식리, 경주 계림로 14호분 출토 금제귀면장식(金製鬼面裝飾), 충청남도 공주 출토 금동판상사구(金銅板狀舍具), 무령왕릉 출토 은제요패(銀製腰佩), 통일신라시대 도연(陶硯)의 연각(硯脚) 등이 그것이다.

경주 계림로 귀면장식의 경우, 금제의 호화품으로 눈썹 이하의 부분이 부식되어 원형을 알 수 없으나, 귀면에 가까운 형식이다. 이와 매우 비슷한 예가 경주 노서동 호우총(壺杅塚)에서 출토된 일이 있는데, 목심칠면(木心漆面)으로서 역시 코 이하가 손상되었으나 큰 눈과 뿔이 현저하여 그 형상이 귀면에 가깝다. 호우총의 발굴조사 보고서에서는 방상(方相 )으로 보고 있으나, 계림로 출토품과의 연관에서 생각할 때 귀면에 가깝게 보인다.

기타 공예품에서의 귀면은 표현공간이 작은 것들이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생략도 불가피하였던 듯하나, 식리의 경우는 사지까지 표현하는 정치(精緻)한 조각으로 기본형을 잘 살리고 있다.

참고문헌

『백제와전도보』(충남대학교백제문화연구소, 1972)
「신라의 기와」(동이문화연구원, 『한국건축사대계』 Ⅴ, 1976)
『백제와전도록』(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83)
『朝鮮瓦塼圖譜』(井內古文化硏究室, 1976∼1981)
『귀갑문과 귀면문』(國立公州博物館, 1990)
「한국적 귀면문양의 조형」(김우석, 『공간』 146, 1979.8.)
집필자
진홍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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