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상은 우주의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을 형상화한 불교조각이다. 동방 지국천(持國天)·서방 광목천(廣目天)·남방 증장천(增長天)·북방 다문천(多聞天) 등 사방의 천왕을 사천왕이라 하고, 이를 도상화한 것이 사천왕상이다. 불교가 서역을 거쳐 중국에 전래되면서 갑옷을 입은 무장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천왕 신앙이 수용된 600년경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통일 신라 이후 크게 성행했다.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에서 그 의미가 더 확대되어 부처나 불사리·불국토를 악으로부터 지켜주는 신장상으로 신앙되어 석굴의 연도·탑신부·사천왕문을 장식해 왔다.
즉, 동방 지국천(持國天), 서방 광목천(廣目天), 남방 증장천(增長天), 북방 다문천(多聞天) 등 사방의 천왕을 사천왕이라 하는데 이를 도상화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사천왕상에 대한 규범이 일정하지 않아서 귀족의 형상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았으나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에 이르러 갑옷을 입은 무장의 모습으로 확립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천왕상이 만들어진 때는 사천왕 신앙이 수용된 600년경을 전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크게 성행한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당시의 명장(名匠) 양지(良志)가 영묘사(靈廟寺)에 사천왕상을 조성하였고, 이어 사천왕사도 건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682년에 세워진 감은사(感恩寺) 삼층석탑의 사리기(舍利器)에는 금동사천왕입상을 조성하여 장엄하고 있다. 이 상은 대단히 정교하고 매우 세련된 사실적인 수법으로 조성되고 있어서 이 당시 사천왕상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사천왕상은 토함산 석굴 연도 입구에 부조된 조각상들이다. 이 석굴 사천왕상들은 연도 좌우로 사상을 배치하여야 하므로 왼쪽[向右]에 동 · 북천왕이, 오른쪽에 남 · 서천왕이 새겨져 있다.
토함산 석굴 사천왕상이 조성되던 전 · 후기에 신라 석탑 탑신부에 사천왕상을 활발히 새기기 시작하였다. 승효곡사지 삼층석탑, 황룡사 서사지(西寺址) 탑부조사천왕상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9세기부터는 고승들의 묘탑에도 사천왕상을 흔히 새기고 있다. 전흥법사염거화상탑(傳興法寺廉居和尙塔, 844년) · 쌍봉사철감선사탑(雙峰寺澈鑑禪師塔, 868년) · 봉암사지증대사탑(鳳巖寺智證大師塔, 884년) · 실상사수철화상탑(實相寺秀澈和尙塔, 894년) 등에 부조된 사천왕상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천왕상은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의 의미가 좀더 확대되어 부처나 불사리(佛舍利) · 불국토(佛國土)나 국가를 악으로부터 지켜 주는 신장상(神將像)으로 신앙되어 계속 조성되었던 것이다. 통일신라 시기를 전후해서 집중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사천왕상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끊임없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현재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전기에 만들어진 사천왕상 유물은 비교적 적은 수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의 사천왕상은 석등 · 부도 · 탑 · 사리기 · 불감 · 금강령 등에 부조된 몇 점이 남아 있는 정도이다. 그중에서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 조사당의 사천왕 벽화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이 벽화는 대체적으로 그 기본형을 통일신라 시기의 감은사 사리기 또는 도리사 사리기 등에서 나타나는 사천왕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고려 불화에서는 사천왕상이 지장시왕도의 협시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특징을 보인다.
1337년(고려 충숙왕 복위 6년)에 양산 통도사의 천왕문이 초창되었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이는 가람의 형태가 평지 가람에서 산지 가람으로 변화하면서 천왕문이 독자적으로 배치되고 그 안에 사천왕상이 안치되기 시작하는 시발점으로 보여 주목된다.
조선시대의 사천왕상은 고려시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새롭게 제작되는 석가모니불회도나 아미타불회도에서는 외호중의 일부분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특히 아미타구존도의 군도(群圖) 형식의 불화가 유행하면서부터 불화에서 사천왕상을 빈번하게 볼 수 있게 된다. 군도 형식의 하나인 목탱화(木幀畵)에서도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조선시대의 사천왕상은 천왕문에 안치된 거대한 사천왕상에서 가장 큰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3∼4m의 거대상인 천왕문 안의 사천왕상들은 목조 또는 소조의 조각상이거나 단독상의 불화로 안치되어 있다.
목조사천왕상은 보림사(전라남도 장흥, 1539년) · 적천사(경상북도 청도, 1690년) · 용문사(경상남도 남해, 1702년) · 쌍계사(경상남도 하동, 1704년) · 봉은사(서울시 강남, 1901년) · 통도사(경상남도 양산, 조선 후기 추정) · 능가사(전라남도 고흥, 조선 후기 추정) · 불갑사(전라남도 영광, 조선 후기 추정)에서 볼 수 있다.
소조사천왕상은 직지사(경상북도 김천, 임란 이전) · 법주사(충청북도 보은, 1624년) · 송광사(전라남도 순천, 1628년) · 화엄사(전라남도 구례, 1632년) · 송광사(전북특별자치도 완주, 1649년) · 수타사(강원특별자치도 홍천, 1676년) · 칠장사(경기도 안성, 조선 후기 추정) · 흥국사(전라남도 여수, 조선 후기 추정)에서 볼 수 있다.
또 단독 탱화로는 홍익대학교박물관(1758년) · 대둔사침계루(전라남도 해남, 1794년) · 대둔사 천불전(1794년) · 대영박물관(1796∼1820년 연간) · 범어사(부산광역시, 1869년) · 동화사(대구광역시, 1896년) · 불갑사(전라남도 영광, 1904년) 등을 들 수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소조사천왕상은 주로 임진왜란 후의 인조 시기에, 목조는 숙종 시기에, 탱화는 영조 시기에 제작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아울러 천왕문 안에 사천왕상이 만들어지는 사찰 대부분이 임란 시기에 의승군의 집합처였다는 사실 또한 호국의 개념에 입각하여 사천왕상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이 점은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전형을 이룬 인조 시기의 사천왕상 제작을 주도한 벽암각성 대사가 서산, 사명 대사의 뒤를 이은 팔도 도총섭으로서 의승군을 이끌었다는 사실로서도 입증된다고 하겠다.
조선 후기 사천왕상은 [그림 1]과 같은 형태상의 특징을 지닌다. 즉, 조각상의 경우 사천왕상은 보편적으로 의좌상(依座像)을 하고 있다. 탱화의 경우에는 입상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중국의 원(元) · 명(明) · 대식(代式)의 갑옷을 입고 있는데 명13릉의 갑옷과 거의 흡사하다. 갑옷 속에는 평상복을 입었고 갑옷 위에는 천계(天界)의 존재임을 나타내는 천의(天衣 : 천인(天人)이나 선녀의 옷)를 걸친다.
특이한 점은 이러한 무장상의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보살의 상징인 화려한 보관, 휘날리는 천의, 귀를 감싸고 돌아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등을 첨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위협적인 사천왕의 형상 위에 자비의 모습을 담아 보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얼굴은 분노상으로 특징 지워진다.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든지 입을 악다물거나 표효하는 듯이 벌리고 있는 모습은 사람의 마음에 위협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비파를 들고 있는 사천왕상의 경우는 반쯤 내려 감은 눈과 노래하는 듯한 입 모습으로 인자한 인상을 준다.
사천왕의 손에는 각각 다른 지물을 잡는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사천왕상이 들고 있는 지물은 주로 병장기로서 칼 · 화살 · 창 · 금강저(金剛杵 : 악마를 깨뜨리는 무기) 등과 같은 것이며 북방천왕의 경우 반드시 탑을 받들고 있다. 이에 반해 조선 후기로 오면서 크게 변화하여 비파 · 칼 · 용과 여의주, 당과 탑으로 정형화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원대 라마교 약사칠불의궤공양법(藥師七佛依軌供養法)의 영향인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좌세는 특이한 편이다. 대체로 한쪽 다리를 비스듬히 올려 어그러진 얼굴과 검은 피부를 지닌 전형적인 형태의 악귀가 받들고 있다. 다른 한쪽 다리는 아래로 내리고 있거나 사람의 배 부분을 밟고 있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주로 동물를 밟고 있는데 반해 조선시대에는 민간인의 형태 또는 전형적인 악귀의 모습을 취한다. 양쪽 발밑에 모두 8구의 악귀를 밟고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밟지 않고 있는 경우도 있다.
조선 후기 사천왕상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가장 주의를 요하는 점은 사천왕상의 지물과 그에 따른 배치와 명칭의 문제라고 하겠다. 천왕문에 배치되는 사천왕상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림 2]와 같다. 즉, 천왕문 입구에서 보아 오른편의 대웅전을 향한 쪽에 비파를 든 사천왕상을, 입구 쪽에 칼을 든 사천왕상을 배치하며, 왼편의 대웅전 쪽에 당과 탑을 든 사천왕상을, 입구 쪽에 용과 여의주를 든 사천왕상을 배치한다.
그런데 학자들 간에는 사천왕상의 명칭을 지물에 따라 각각 달리 부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비파를 든 사천왕상을 동방지국천왕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북방다문천왕이라고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선 후기 사천왕 조각상과 중국 원 · 명 · 청대의 사천왕 조각상들에서는 비파를 든 사천왕상을 동방지국천왕이라고 부르고 있는 반면, 조선 후기 사천왕 탱화에서는 칼을 든 사천왕상에게 동방지국천왕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천왕상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서까지도 사천왕상의 지칭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북방다문천왕이 보탑을 받든다는 원칙에서 보자면 비파를 든 사천왕을 동방지국천왕으로 보는 사천왕 조각상의 명칭 방법이 옳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