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군위성결교회 ( )

개신교
유적
문화재
대구광역시 군위군 군위읍에 있는 일제강점기 개신교 성결교단 교회. 성결교회. 등록문화재.
정의
대구광역시 군위군 군위읍에 있는 일제강점기 개신교 성결교단 교회. 성결교회. 등록문화재.
개설

2006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라는 4중 복음을 근본교리로 하며,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에 설립된 성결교회이다. 1943년 12월 성결교회 해산명령으로 1944년 4월 5일자로 폐지되었다가 해방 후 복원되었다.

역사적 변천

1920년 9월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통해 군위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헤스롭(William Heslop) 선교사는 풍금을 팔아 헌금한 돈으로 당시 군위면 서부동 이학수의 집을 구입, 수리하여 그해 10월 15일 교회를 창립하였고, 초대 교역자로 김병선 전도사를 파송하였다.

1927년 9월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낙성식을 겸해 지방 전도대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 3월 교회 담임자가 강태즙(姜泰楫)에서 오덕삼(吳德三)으로 변경되었고, 1933년 4월에는 김창규(金昌圭)로, 1937년 2월에는 이종익(李鍾翊)으로, 1940년 에는 최헌(崔献)으로 변경되었다. 1937년 6월 예배당을 헐고 새로 건립한 것이 지금 남아있는 건물이다. 구 예배당을 철거하던 중 건물이 무너져 제7대 담임인 이종익 목사와 신자인 노성문 집사 두 명이 중경상을 당하였다. 이후 신자들은 당시 삼천포교회에서 시무하던 임도오 목사를 건축 감독으로 맡겼고, 그해 8월에 재건되었다.

1940년 10월 16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개편하자 성결교회도 10월 22일 임시연회에서 국민총력성결교회연맹으로 개편하는 것을 결정하였다. 성결교단은 1943년 5월 5일에는 ‘일본기독교 조선성결교단’으로 개칭하였고, 이명직 목사가 통리를 맡아 1943년 12월 성결교회가 해산되기까지 일제의 충실한 협력단체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성결교회의 4중 복음 가운데 재림교리를 문제 삼아 1943년 5월부터 성결교회의 대부분의 교역자들을 잡아들이고, 9월에는 예배와 집회를 금지시켰으며, 12월에는 ‘해산성명서’를 발표하고 해산시켰다. 군위성결교회도 1944년 4월 5일자로 폐지되었다가, 해방 후 복원되었다.

특징

군위성결교회는 1937년에 건축된 구 예배당 건물과 선교실, 본당, 교육선교관 등 4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구 예배당 건물은 2006년 12월 4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 되었고, 이후 복원을 요청하여 2010년 9월 복원되었다. 구 예배당은 연면적 109.56㎡의 1층 건물로 정면에는 남녀 출입구가 따로 배치되어 있고 각각 포치(porch)를 설치했다. 전실 1칸, 교회당 4칸, 목사사택 2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후 전실 1칸과 교회당 6칸으로 변경되었다.

참고문헌

「일제 말기 성결교회의 수난과 교단 해산」(김승태, 『한국기독교와 역사』25, 2006)
「崔獻 판결문」(大邱地方法院 형사부, 昭和17년 刑公 제988호, 1943.2.24)
『조선총독부 관보』(제1254호-1931.3.13.; 제1882호-1933.4.20.; 제3019호-1937.2.9.; 제4136호-1940.11.4.; 제5148호-1944.4.5.)
『동아일보』(1927.9.17.; 1937.6.4.)
집필자
박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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