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에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이 중국 북간도 용정(龍井)에 설립한 서전서숙(瑞甸書塾)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에는 간민회(墾民會)의 부속 단체로 길동기독학당(吉東基督學堂) 졸업생이 조직한 동제회(同濟會)에서 활동하였다. 그 뒤 1914년 9월에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호천포에 예수교 계통의 청호학교(淸湖學校)를 설립하여 재만 한인 청년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1919년 3월에 조선독립기성총회(朝鮮獨立期成總會, 대한독립기성총회(大韓獨立期成總會))가 조직되자 강백규는 이홍준(李弘俊)·서성권(徐成權) 등과 함께 간도 국자가(局子街) 방면의 대표로 활동하였다. 당시 북간도 일대에 조선 경성의 3·1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용정 및 국자가의 운동가들은 비밀리에 회의를 열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통일체로 조선독립기성총회를 조직하였다. 총회에서는 구춘선(具春先)을 회장으로 임명하고, 3월 13일에 「독립선언포고문」를 작성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또한 이 해에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자 강백규는 조선독립기성총회를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바꾸고 노령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활동하였다. 대한국민회는 북간도 4개현에 거주하고 있는 40만 한인들을 기반으로 조직되었는데, 지회만도 80여 개소에 이르렀다.
1920년 3월에 강백규는 연길현 와룡동에서 서성권(徐成權)·강상모(姜尙模, 1894∼1944)·김강(金剛, ?∼1920) 등과 함께 간도청년회를 조직한 뒤 부회장을 맡아 일본인 기관 및 회사 등에 취직한 한인에게 항일운동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후 서성권과 함께 연길현 팔도구에서 무장독립군인 대한청년단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4년 2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1회 국민위원회가 개최되었는데, 방원성(方遠成)·김우희(金宇希) 등과 함께 10명의 후보 국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민위원회는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창조파들이 임시 의정원을 대신하여 설치한 조직이었다.
1963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994년 10월에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