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 1878년 6월 25일에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에서 출생하였다.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의 처남이자, 독립운동가·교육가 김마리아(金瑪利亞, 1891∼1944)의 삼촌이다.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로,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주치의로 활동하였다.
1908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하였는데, 다른 6명과 함께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가 되었다. 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상동교회에서 구국운동을 펼쳤고, 세브란스병원에 재직하면서는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협의하는 장소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안창호(安昌浩, 1878∼1938)와 의형제를 맺고 전국민은 무장세력의 양성과 군비를 갖추며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는 뜻을 함께 하고는 1907년에 신민회를 조직하여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적극 동참하였다.
1911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동녕(李東寧, 1869∼1940)·전병현(全秉鉉) 등과 함께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기지의 개척에 힘썼다. 그 뒤 내몽골 치치하얼[齊齊哈爾]에 병원을 열어 부상당한 독립군을 치료하고, 병원을 독립운동가의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도록 하였으며, 대부분의 수입을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하였다. 또한 수십만 평의 토지를 구입하고서 100여 호의 한인들을 이주시킨 뒤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후방 기지로 개척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1919년 9월 1일에 일본인 조수가 준 우유를 먹고 순국하였다.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