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고종 19) 초에 청나라는 조선인들이 간도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관리할 것을 조선 정부에 요구하였다. 청나라는 다음 해 4월에도 간도의 조선 농민을 모두 소환하도록 정치적 압력을 가하였다. 조선 정부는 5월에 영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을 서북경략사로 임명하였다. 어윤중은 간도에 살고 있던 함경도 종성 출신의 김우식에게 1712년(숙종 38)에 건립한 백두산정계비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김우식은 백두산의 분수령을 찾아 현장을 조사하였고, 국경 문제의 논란인 토문강(土門江)의 원류(源流)도 답사하였다. 또한 청나라 강희제 때 지금의 길림 일대를 맡았던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이 작성한 정계비기(定界碑記)도 구하였다.
어윤중은 이러한 자료와 조사 결과를 토대로, “정계비의 토문은 북류(北流)하여 송화강으로 흐르는 강이고 무산 · 회령으로 향하는 두만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므로, 찾아서 돌려 보낼 유민(流民)은 토문강 밖의 월간자이지 토문강 안쪽의 월간자는 아니다”고 하면서,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그 뒤 조선과 청나라는 ‘감계담판(勘界談判)’을 시도하였지만, 의견의 차이를 좁히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