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이후 중국으로 들어가 대한독립단에 참여하였고, 내몽골 지역에서는 중국 국민당군의 군의관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에 힘썼다.
1894년 10월 22일에 평안북도 중강군 장사면에서 태어났다. 그 뒤의 활동은 잘 알 수 없으나 중강진공립병원 의사로 재직하면서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일제의 감시 때문에 독립운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청년 37명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길림성 유하현(柳河縣)으로 망명하고는 조맹선(趙孟善, ?∼1922)이 이끌고 있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참여하였다. 대한독립단이 ‘대한독립단총단’으로 바뀌어 불렸을 때 의무부장을 맡아 장백현 지단의 정황을 파악하고, 신입 청년의 신체검사와 치료를 담당하였다. 특히 중국 거주민이나 토비(土匪)를 치료하면서 서간도 일대에 유명한 의사로 알려졌다.
그 뒤 팔도강 특파대를 조직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1923년 경에는 북경으로 이주하여 8월 경에 해전(海甸)에서 안창호(安昌浩) 등과 농장을 경영하며 아신의원(亞新醫院)을 열고 진료하였다. 1926년 경에는 남경 국민정부의 북벌군 풍옥상(馮玉祥) 부대에 참여하여 산서성 대동(大同)・태원(太原) 등지에 병원을 설립하였다.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내몽골로 이동하여 하투(河套)·영하(寧夏) 일대에서 국민당군 군의관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친일 몽골군과의 전투에 나섰다. 1944년 8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인 김구(金九)의 공작 지령을 받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주수원성초모처를 조직하여 광복군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에 그는 섬파에서 의사로 생활하며 지냈다. 다만 국공 간의 내전과 좌우대립 속에서 고초를 겪으며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1958년에 나이 65세로 병원에서 퇴직한 뒤 북경으로 이주하여 딸과 함께 지내다가 1967년에 삶을 마감하였다.
200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