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9월에 중국으로 들어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하여 한국독립당·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한국광복군 등에서 활동하였다.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명곡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현수(李賢壽)이고, 이연호(李然浩)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1917년 9월에 숭실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상해로 건너간 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독립운동가들과 만났다. 모친상을 당하여 잠시 귀국하였다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자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1920년 8월에는 국내로 몰래 들어와 밀양의 집성학교(集成學校)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포위망을 좁히자 1923년 1월에 자수하였고 1924년 5월에 석방되었다. 그 뒤 1년여 동안 밀양에 머물다가 1925년 4월에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26년 출범한 의열투쟁 겸 임시정부 외곽단체인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에서 활동하였다. 1928년 1월에는 복건성 하문(厦門)으로 이주하여 인삼 행상을 하면서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하였다. 1930년대에는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에서 기관지 「한성(韓聲)」을 발행하였고, 혁신사(革新社)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최근한국의사열전』을 출판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민족혁명당에서 활동하면서 1939년 1월에 「동방전우(東方戰友)」 제1기를 간행하였으며 조선의용대와도 관계를 맺었다. 조선의용대의 기관지 편집위원회 주임으로「조선의용대통신」편집에 참여하며 시와 논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42년 전후에는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자 중경으로 옮겨, 1943년 3월부터 1년 동안 법무부 차장을 맡았다. 1946년 환국한 뒤에 조선대중당을 조직하였고 동방문화협진사를 설립하여 사장으로 재임하였다. 6·25전쟁 당시 납북되었거나 월북하였다고 전한다.
이두산은 문필에 뛰어나 독립운동 단체의 기관지를 맡아 운영하였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계에서 널리 불려진 ‘선봉대가’와 ‘광복군행진곡’을 작사·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