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함흥시 성천동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월순이고 홍심(紅心)은 예명이다. 1925년 12세 때 함흥권번에 입적하여, 정남희(1905~1984)에게 가야금산조와 병창을 익혔다. 춤은 당시 권번 소속 춤 선생인 배씨 할머니에게 학습했다. 1934년 21세의 나이에 서울의 조선권번에서 한성준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1937년 12월 28일 창립된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발기인으로 동참하여 30여 명의 회원과 더불어 서울 공연은 물론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검무」·「살풀이춤」·「태평무」를 주로 춤추었다. 해방되기 몇 년 전에 고향 함흥으로 되돌아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함흥에서 음악동맹에 소속되어 함흥음악무용학교에서 무용 지도자로 활동했다. 함흥에 순회공연을 온 최승희와 안성희를 만나 평양으로 옮겨 음악동맹 정회원자격과 함께 1급 배우무용수로 승급되었다. 하지만 곧 사상불순을 이유로 음악동맹에서 제명당하고,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1953년 부산 초량에 동양무용연구소를 개소하고, 1956년의 부산무용가협회 창립공연에서 「검무」를 추는 등 협회 활동에 적극 동참했다. 1958년에는 작품활동을 활발히 하는 가운데, 이매방(李梅芳)을 만났고 장홍심의 「함흥검무」와 이매방의 「승무」가락을 이매방무용연구소에서 서로 주고받았다고 한다. 한때 부산에서 명창 박귀희(朴貴姬), 김소희(金素姬)에게 춤을 지도하는 인연을 맺었다.
1967년 초에 서울로 올라와 박초월국악연구소에서 춤강사로 약 9년간 활동했다. 이후 여러 무용학원 강사를 전전하다가 말년에 중곡동 시장 안에 ‘장홍심고전무용교습소’를 개소하여 제자를 양성하다가 1994년 4월 27일에 생을 마감했다.
자녀는 없으며, 대표 제자로는 이성자(李成子), 여연화(呂蓮花)가 있다. 김은미·김희연·김지선은 중곡동에서 학습한 제자이다. 「검무」·「노승무(바라승무)」·「한량무」·「수건춤(입춤)」·「살풀이춤」·「포구락」·「항장무」·「태평무」·「화관무」 등을 춤추고, 지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