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택원(趙澤元) 문하에서 춤에 입문하였다. 14세 때 황인호(黃仁好)와 함께 1935년 8월 한 달 동안 조택원을 따라 『동아일보』 ‘독자위안 납량무용음악의 밤’을 위해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진수방은 일생 동안 조택원·한성준·이시이 바쿠[石井漠]·가와카미 스즈코[河上鈴子], 러시아인 크리아스노바 등 여러 스승 밑에서 다양한 춤 종목을 익혔다. 1940년 무용연구소를 세워 아동무용과와 예술무용과를 분반하여 무용 대중화와 후배 양성에 힘썼다. 1946년 조선무용예술협회가 결성되었을 때 발레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56년에는 한국무용가협회장이 되었고, 1959년에는 한국무용협회를 새로 발족하여 회장을 역임했다. 국립발레단의 창설을 역설하여 1962년 국립무용단이 설립되었지만 내부적 갈등으로 무용단 임원직을 사퇴했다. 1963년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제세버 발레스쿨’ 원장의 초청으로 발레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이후 미국에 정착하여 재미 무용가로서 미국 순회공연을 하는 등 활발히 활동 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에는 방한하여 국내 무용가들에게 발레와 재즈 특강을 했으며, 뉴욕에서 말년을 보냈다.
주요작품으로 「물긷는 아가씨」(1947년 초연), 「그랜드코리안발레」(1961년 초연, 지영희 조병학 편곡)이 있다. 조선 춤, 발레, 스페인 무용 등을 다양하게 익힌 진수방은 발레를 기반으로 한국 무용계의 발전을 도모하였고, 예술적 기틀 확립에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62년 12월 ‘서울특별시문화상’을 수여받았고, 1974년 8월에는 미국 국립예술재단으로부터 예술장려금을 지원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