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8월 10일 ‘조선무용진흥론(1)’이 『동아일보』에 발표된 이후, 11일 ‘조선무용진흥론(2)’, 12일 ‘조선무용진흥론(3)’, 13일 ‘조선무용진흥론(4)’, 16일 ‘조선무용진흥론(5)’, 17일 ‘조선무용진흥론(6)’, 19일 ‘조선무용진흥론(7)’이 연재되었다.
당시 시인으로 활동한 김동환은 『동아일보』 8월 10일자에 영남지방의 「쾌지나 칭칭나네」란 속요를 “광란적으로 무예 비슷한 무용”이라 했고, 11일자에서는 고대사회는 예악(악이라 함은 음악과 무용을 포함한다.)이 성행했고, 56년 전에는 “경북궁 경회루에서 삼현육각의 반주로 의상의 묘를 극한 무희들의 춤을 보았다. 그는 현란하였다. 전아하였다. 침정하였다”라고 평했다. 12일자에는 “무녀 중심의 성황당 무용 외에 불사나 기독교회 단군 교회 등에 관계된 것이 많지 못한 형편이며, … 태평무나 춘앵무와 거세한 무사의 동작같은 검무”등 상당한 감상안을 가진 발언을 했으며, “종교무는 산간의 신당에 박혀 있고 경부하고 기교하고 중고정도조차 이른 아무는 도회를 유량하면서 고악의 힘을 빌어 겨우 존재하여 있으며 그래도 향토무용은 농촌 어촌에 다소 남아서 소박한 원시적 특조를 전하고 있다.”라고 하여 우리 무용의 분포를 지적했다. 13일자에서는 생활향상과 상무적 기풍의 향토무용의 본질이 도취적으로 변하였고, 이에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대중적 현실적인 무용을 창조해야 한다고 그 계몽적 의의를 강조하였다.
이어 16일자에서는 예술상의 언동을 조선의 행복을 위하는데 바쳐야 한다고 했으며, 17일자에서는 “동작이 선율적으로 흐를 때를 가리켜 무용”이라고 정의하고, “무용은 몸짓으로 인간감정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또한 무용은 음예한 것이라거나 오락 또는 위로를 주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열열한 기개의 고무와 단체의식을 주기 위하여 국가적 교화의 요소로써 있는 터인즉…”, “신무용의 성질은 첫째 군중적일 것, 둘째 야성적일 것이어야 하겠다.”라고 하면서 그 방법은 결론적으로 “신시대의 무용은 반드시 다수가 하는 군무이어야 하겠다.”라고 주장했다. 마지막 19일자에서는 군중적인 무용을 진흥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단오, 추석 명절과 초중말의 삼복을 전국적 무용일로 정해 다같이 춤추며, 선구자의 수난 당시 또는 사회적 의의를 가진 학교, 청년회 등 단체의 특정일에 기념무용을 추며, 농어촌의 수확시기에 성황리에 춤을 출 것이며, 사람의 관혼상례 때도 춤을 즐기고, 각 지방의 특수형편에 맞게 추가적으로 춤출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종합하면, 김동환의 글은 신문화가 한참 꽃피기 시작할 무렵에 쓴 것이기 때문에 다분히 계몽주의적이며, 대부분 홀로 추어졌던 고대무용과는 달리 신시대적에는 집단성이 강조되는 군무가 성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또한 무용을 구시대적인 관념으로 천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무용진흥론」을 통해 김동환은 민속무용을 대중적으로 부흥시켜 민족정신을 찾아야 한다는 뜻을 피력했고, 그의 무용개혁에 대한 논의는 당시 지식인들의 무용인식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최초의 무용 평론으로 이때부터 무용 비평의 역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