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설립 초기에는 3개월마다 면접과 실기시험을 통해 연구생을 모집했고, 그 후에는 반년을 1기로 30명씩 1년에 60명의 젊은 무용지망자를 받아들였다. 초기에는 모집광고를 학교, 예술단체에 배포했으나, 이후에는 아시아의 사회주의국가에까지도 모집요강을 보냈다. 초기 교육과목으로 이사도라 덩컨류의 모던댄스, 이시이 바쿠류의 신무용, 발레, 조선무용, 남방무용, 중국무용,인도무용 등이 있었다.한국전쟁 이후의 실기 교과목으로는 조선무용과 발레, 작품연습, 피아노 등이 있었으며, 이론은 세계무용사와 외국어(러시아어)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을 강화한 정치과목을 추가해 나갔다. 무용훈련은 발레의 빠, 센터, 스트레칭 순으로 신체의 근육을 이완시킨 후 조선무용기본으로 시작하여 작품연습으로 마무리 한 것으로 추정된다.
1947년 제1기 졸업생들의 공연이후, 제2기생부터는 3년 과정의 연구과정과 학원형식으로 운영된 학생부 과정으로 나누어 지도하였고, 독무가로서의 재능이 있는 원생은 최승희의 개인지도를 받았다. 배출한 졸업생의 수는 500여 명에 달하며, 무용가 또는 무용교육가로 성장하여 북한의 무용예술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학원체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무용연구소에서 힘든 과정을 마친 재능 있는 졸업생을 중심으로 창작집단을 구성하여 창작활동을 이끌었다. 최승희는 창작집단과 함께 무용작품의 안무와 창작을 하는 한편으로 인재발굴과 무용지도자의 파견에도 힘을 쏟아 무용보급을 도왔다.
무용인재를 양성해 우수한 무용가 및 무용연구자, 무용교육자, 안무가와 창작자 등을 배출함으로써 북한 무용발전에 기여하고자 국가적 차원의 지원하에 설립되었다.
북한 무용예술의 어머니격 단체인 무용연구소는 1953년에 국립으로 승격된 후 내부제도의 개편과 더불어 국립무용학교(1956)로 새롭게 개칭되었고, 10년 후에는 평양예술대학(1965)을 거쳐 평양음악무용대학(1972)으로 통합되었다.
설립자 최승희는 “북한 전역에 있는 각 무용그룹이나 도립무용단 및 공장과 기업, 농촌, 어촌 등에까지 무용지도자를 파견하여” 무용지도는 물론, 재능있는 인재를 발굴하여 무용연구소에 입문시키도록 하는 등 무용인재 육성과 무용예술의 보급 및 대중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무용지도자의 파견은 창작일꾼들이 민중과 함께 생활하는 현지에서의 체험을 통해 무용창조의 영감과 생활적 소재를 얻어 많은 창작품을 내놓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당의 문예정책에 따른 무용가들의 현지파견은 최승희 창작집단의 전통의 하나가 되었다.
1992년 경 평양에 ‘최승희무용연구회’가 조직되어 최승희의 무용을 복원·보존시켜 나가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북한의 무용은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거점으로 그 토대와 기법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 단체는 오늘의 북한예술로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기관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