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충청남도 온양 출생으로, 1907년 중국으로 건너가 1912년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졸업하고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29년 민병길, 윤기섭 등과 난징[南京]에서 한국혁명당을 조직했으며, 한국혁명당은 1933년 2월 자발적으로 한국독립당과 합당해 신한독립당이 되었다. 1935년 7월,조선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인독립당 등 5개 군소정당이 통합해 한국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고, 한국민족혁명당은 1937년 1월 난징에서 열린 대표회의에서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되었다. 이 대표회의에서 성주식은 김원봉, 지청천, 윤기섭, 신익희, 윤세위, 김상덕, 최동오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8년 중일전쟁 중에는 독립운동단체를 망라한 조선민족통일전선 총연맹 결성에 참여했으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 창설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3년에는 충칭[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 되었다.
1945년 해방 후, 12월 2일 조성환, 황학수, 장건상 등과 함께 임시정부 국무위원의 일원으로 귀국했다. 1946년 1월 김구, 이승만이 주도한 비상정치회의주비회에 조선민족혁명당 소속으로 참여했으며, 여기에서 “민주주의통일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좌우 제휴할 것”을 제창했으나 여의치 않자, 김성숙, 김원봉 등과 함께 임시정부 국무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1946년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가해, 7월 좌우합작위원회 예비회담의 좌익측 대표로 여운형, 정노식, 이강국 등과 함께 출석했다. 1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보선의장(補選議長)에 선출되었으며, 허헌, 박헌영, 김원봉, 유영준, 홍남표, 이주하, 이기석 등과 함께 임시집행부로 추대되었다.
1947년 1월 민주주의민족전선확대위원회의 14인 의장단, 2월 반일운동자구원회 본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같은해 5월 민족혁명당 당대회에서 당명을 인민공화당(人民共和黨)으로 개칭할 당시, 김원봉 등과 함께 38인의 중앙위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후 월북하여 1948년 8월 북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남조선대표 대의원 360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으며,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을 거쳐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 1959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