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선은 일제강점기, 강원도 양양에서 일어난 3 · 1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9일 양양군 현북면 면사무소에서 어성전리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기사문리 경찰관주재소에서 만세를 부르며 습격하였다. 출동한 보병과 일경들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19년 4월 9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현북면(縣北面) 면사무소와 주재소에서 약 600여 명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현북면에서는 4월 7일 원일전리(元日田里)의 박규병(朴奎秉)의 권유로 장동리(獐洞里) 고개에 100여 명이 집합하였다. 이들은 양양 읍내로 이동하던 중 임천리(林泉里)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한편, 4월 6일부터 도리(陶里)의 김재한(金在漢)이 면내 각 마을을 다니며 독립만세 참가를 권유하였다.
4월 9일 어성전리(漁城田里)에서는 구장 김두칠(金斗七)의 권유에 따라 함기문(咸基文) 등 주민들과 함께 면사무소로 갔다. 양양 읍내로 가려는 계획을 변경하여 면사무소 주변 광장에 600여 명의 면민들이 집합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만세 군중들은 면사무소에서 기사문리(其士門里)의 기사문경찰관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주재소에서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와 일본 경찰들을 공격하였다.
4월 4일부터 양양 읍내를 중심으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일제는 4월 8일 강릉(江陵)에서 보병 79연대 하사 이하 5명을 급파하여 주둔시키고 있었다. 출동한 보병의 지원을 받은 주재소 일경들이 실탄을 발포하는 무력으로 군중들을 진압하였다. 현장에서 고대선을 포함해 어성전리의 황응상(黃應相), 김석희(金錫熙) 등과 함께 9명이 순국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4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일제의 검거 작전으로 5월 중순까지 370여 명이 체포를 당하고, 일제의 탄압에 200여 명이 주재소에 자진 출두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