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칠성은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면에서 일어난 3 · 1독립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1일 정주군 동주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이어 정주면 정주 읍내로 이동하였다. 정주 읍내 우체국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선두에서 시위 군중을 주도하며 일본 군병과 충돌하였다. 시위가 격렬해지며 장자현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헌병들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19년 3월 31일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면(定州面) 정주 읍내에서 약 4,000명의 천도교인, 기독교인 등이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주에서는 3월 1일 독립만세를 외치려는 시도가 있은 후 3월 6일 곽산(郭山), 3월 7일 갈산(葛山) 오산학교(五山學校), 고읍(古邑), 아이포(阿耳浦), 3월 8일 정주에서 각각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정주에서는 3월 15일 기독교인, 학생, 주민들이 함께 만세를 불렀다.
한편, 천도교 측에서는 김진팔(金鎭八)이 경성의 독립만세 상황 등을 정주에 전하였다. 정주 교구장 최석일(崔晳一)은 백중빈(白重彬), 이근배(李根培) 등 천도교 간부들과 회합을 갖고 3월 31일 독립만세를 결의하고 군내 각처에 통지하였다. 3월 31일 고읍, 곽산, 고현(高峴), 동주(東州), 마산(馬山), 이언(伊彦) 등 각 면에서 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고, 정주 읍내에서는 군민들이 집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동주면에서는 박일경(朴一擎)이 천도교도 승인즙(承仁楫)과 협의하여 600여 명의 면민들을 집결시켜 태극기를 흔들며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면 직원들에게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장부 서류와 기구들을 불태운 후 만세 삼창을 불렀다. 김칠성은 군중들과 함께 정주 읍내로 갔다.
정오경부터 읍내 동쪽 1리 정도의 언덕에 군중들이 집결하기 시작하여 오후 1시 30분경 읍내로 진입을 시도하였다. 오후 2시경에는 고현 · 동주 · 신안(新安) 등의 면민들이 읍성 동문(東門), 아이포 · 이언 · 덕달(德達) 등 면민들이 남문(南門), 임해(臨海) 등 면민들은 서문(西門)을 통해 읍성 내로 진입하였다.
읍내에 집결한 군중들은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남문 쪽으로 이동하여 정주우편국 앞으로 만세 행진을 전개하였다. 김칠성은 우체국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선두에서 시위 군중을 주도하며 일본 군병과 충돌하였다.
일제는 성내동(城內洞)의 정주 헌병분대(憲兵分隊) 헌병과 보병 제77연대 수비대 도비타[飛田] 중위 휘하 48명의 보병 및 소방대(消防隊) 10여 명 등을 출동시켜 만세 군중들을 진압하였다. 수비대가 ‘독립(獨立)’ 깃발을 든 김사걸(金士杰)을 총칼로 쓰러뜨렸다. 이에 최석일이 깃발을 주어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수비대가 그의 오른팔을 내리쳤다. 이어 다시 왼손으로 깃발을 주어 흔들자, 헌병이 왼팔마저 내리치고 찔러 결국 순국하게 되었다. 2명의 순국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한 군중들은 더욱 격렬하게 항거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자 수비대와 소방대 등이 군중들을 향해 일제히 무차별 사격을 자행하였다. 김칠성은 동주에서부터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참가하였던 승처달(承處達), 승길룡(承吉龍), 승응칠(承應七), 박창서(朴昌瑞) 등과 함께 장자현(長字峴)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수비대, 소방조, 사냥꾼[獵夫]들의 무자비한 총격에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 독립만세운동으로 현장에서 28명이 순국하고 경상자 58명을 포함한 99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순국 인사 28명 중에 여자 1명이 김칠성의 부인이라는 기록도 있다. 현장과 이후에 검거된 인사가 100여 명에 이르렀다.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