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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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7년 10월 16일
사망 연도
1919년 6월 28일
출생지
충청북도 옥천
대표 상훈
대통령표창|건국훈장 애국장
내용 요약

김순구는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에서 일어난 3 · 1독립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3일 청주군 강내면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그 뒤 귀가하여 4월 8일 옥천군 군서면 하동리에서 주민들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서화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피신 중에 주민들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옥천 헌병분대에 출두하였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주요 활동

1919년 3월 23일 충청북도 청주군 강내면(江內面) 태성리(台城里)에서 조동식(趙東植)이 수십 명의 마을 주민들과 산에 올라 횃불 독립만세를 전개하였다. 강외면(江外面), 옥산면(玉山面) 등에서도 산에 횃불이 올랐고, 이어 만세 군중들이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鳥致院) 방면으로 이동하여 횃불 독립만세운동이 연기(燕岐)까지 확산되었다.

이때의 독립운동에 참가한 김순구는 귀가하여 옥천군 군서면(郡西面) 하동리(下東里)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8일 오후 9시경 김교윤(金敎潤)을 시켜 하동리 마을 주민들을 박래현(朴來賢) 집 부근 우물가에 집합하도록 하였다. 수십 명의 주민들이 집합하자, 이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주민들을 이끌고 마을 남쪽의 서화산(西華山)에 올라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횃불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오동리(梧桐里) 헌병주재소에서 옥천 헌병분대로 급보하여 출동한 헌병들이 만세 군중들을 진압하여 해산하였다. 헌병들의 체포 작전을 벗어나 피신하여 있던 중에 주민들이 헌병들에게 체포되어 고초를 겪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옥천 헌병분대에 자진하여 출두하였다.

이후 공주지방법원(公州地方法院)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가 6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선고를 받은 10일만인 6월 28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형사사건부」(국가기록원)

단행본

김진호, 『국내 3 · 1운동 Ⅱ-남부』(『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0,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독립유공자공훈록』 3(국가보훈처, 198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국가보훈처, 1971)
김승학, 『한국독립사』(독립문화사, 1965)

논문

김진호, 「충북의 3 · 1운동」(『역사와 담론』 68, 호서사학회, 2013)

신문 · 잡지

『매일신보』(1919. 4. 11.)

판결문

「판결문」(공주지방법원, 1919. 6. 18.)

인터넷 자료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집필자
김진호(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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