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23일 충청북도 청주군 강내면(江內面) 태성리(台城里)에서 조동식(趙東植)이 수십 명의 마을 주민들과 산에 올라 횃불 독립만세를 전개하였다. 강외면(江外面), 옥산면(玉山面) 등에서도 산에 횃불이 올랐고, 이어 만세 군중들이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鳥致院) 방면으로 이동하여 횃불 독립만세운동이 연기(燕岐)까지 확산되었다.
이때의 독립운동에 참가한 김순구는 귀가하여 옥천군 군서면(郡西面) 하동리(下東里)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8일 오후 9시경 김교윤(金敎潤)을 시켜 하동리 마을 주민들을 박래현(朴來賢) 집 부근 우물가에 집합하도록 하였다. 수십 명의 주민들이 집합하자, 이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주민들을 이끌고 마을 남쪽의 서화산(西華山)에 올라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횃불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오동리(梧桐里) 헌병주재소에서 옥천 헌병분대로 급보하여 출동한 헌병들이 만세 군중들을 진압하여 해산하였다. 헌병들의 체포 작전을 벗어나 피신하여 있던 중에 주민들이 헌병들에게 체포되어 고초를 겪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옥천 헌병분대에 자진하여 출두하였다.
이후 공주지방법원(公州地方法院)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가 6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선고를 받은 10일만인 6월 28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