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갑은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단천군 단천 읍내에서 일어난 3 · 1독립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0일 함경남도 단천군 단천 읍내에서 일어난 3 · 1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3월 8일부터 독립만세운동을 협의하고 준비하여 3월 10일 천도교 교도와 주민들과 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당일 시위대에 주민들이 합류해 대규모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헌병들의 무차별적인 총격으로 김상갑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19년 3월 10일 함경남도 단천군 단천(端川) 읍내에서 천도교 신도들 중심으로 약 1,000여 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3일 경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가 단천에 전달되었다. 3월 8일 천도교 교도인 안성교(安聖敎), 최덕복(崔德福), 설운룡(薛雲龍), 최석곤(崔錫崑) 등이 회합을 갖고 독립만세에 대한 협의를 하였다.
3월 9일 안성교는 이원(利原)으로 가서 이원천도교구장 김병준(金秉濬)를 만나 독립선언과 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운동을 확인하고, 3월 10일 단천으로 돌아와 오전 10시경 단천천도교구실에 도착하였다. 설운룡, 염원형(廉元亨) 등은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 순도기념일(殉道紀念日)인 3월 10일에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하였다.
예정대로 3월 10일 김상갑은 안성교, 최덕복, 설운룡, 최석곤, 염원형 등과 함께 천도교 교도와 주민들과 만세를 부르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오전 11시 단천천도교구당에 천도교도와 주민 300여 명과 함께 집합하였다. 먼저 기념식을 거행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외쳤다. 교구장 염구헌(廉九憲), 염원형 등은 독립운동을 설명하고 독립만세를 주창하며 주의사항을 당부하는 한편 독립 연설을 하였다.
만세 군중들과 태극기를 선두로 시위대는 교구당을 떠나 용현리(龍峴里)를 거쳐 하서리 단천 읍내에 이르렀다. 시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기를 세우고 "조선민국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읍내 주민 약 800여 명이 동참하여 만세 군중은 1,000여 명이 이르렀다. 군중들은 군청을 습격하고 서상리(西上里) 단천헌병분대로 향하고자 하였다.
헌병들은 일본인을 피난시키고 재향군인과 장정 등으로 경계대(警戒隊)를 조직해 대비하였다. 주남리(州南里) 삼거리에서 만세 군중과 헌병들이 맞부딪쳤다. 최석곤, 설운룡 등이 “저항하라”, "반항하라"면서 군중들을 독려하였다.
선두에서 30명이 막대기를 휘두르고 뒤편의 군중들은 돌을 던지자, 헌병들은 약 10보 정도 후퇴하였다. 이때 약 100여 명은 헌병들에게 돌진하여 총기를 탈취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자 헌병분대장의 명령에 따라 헌병들은 일제히 무차별적인 사격을 자행하였다. 헌병들의 무력 진압으로 서봉화(徐鳳化) · 염석한(廉錫漢) 등과 함께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143명이 체포를 당하였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