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걸은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1일 정주읍 장날을 이용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정주우체국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선두에서 시위 군중을 주도하며 행진을 전개하던 중 일본 경찰과 충돌하였다. 일본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19년 3월 31일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장날 만세시위는 천도교 간부인 김진팔(金鎭八)이 1919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서울 우이동 봉황각(鳳凰閣)에서 열린 49일 기도회에 참석하였다가 3 · 1독립운동에 관한 밀령을 받고, 2월 말 정주로 돌아오면서 추진되었다.
김진팔은 당시 정주 교구장인 최석일(崔晳一)을 비롯하여 직원 서인화(徐仁和), 백중빈(白重彬), 이근배(李根培), 박윤길(朴允吉) 등에게 서울의 만세 소식을 전하고, 3월 31일 정주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태극기 제작 및 선언서 인쇄를 비롯하여 군중 동원 등 만세시위를 위한 준비를 차질없이 마쳤다.
거사 당일인 3월 31일 신안(新安) · 동주(東州) · 고현(高峴) 면민들은 읍성 동문(東門)으로, 이언(伊彦) · 복달(復達) · 아이포(阿耳浦) 면민들은 남문(南門)으로, 임해(臨海) 면민들은 서문(西門)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모인 시위 군중은 2만 5,000여 명에 달하였다. 김사걸은 이날 읍내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우체국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선두에서 시위 군중을 주도하며 행진을 전개하던 중 출동한 일경 및 헌병과 충돌하였다.
이때 시위대의 선두에서 왼손에 태극기를 흔들고, 오른손에 '독립'이라 쓴 큰 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던 최석일이 일경의 칼에 양팔이 잘려지며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함께 선두에 섰던 김사걸은 쓰러진 최석일을 대신하여 최석일의 손에서 떨어진 깃발을 주어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은 쇠갈구리로 배를 마구 찌른데 이어 총을 발사하여 김사걸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