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은 강계면 만세운동의 주동자인 김경하(金京河)이다.
평안북도 강계군에서는 1919년 4월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4월 8일 강계군 중심지인 강계면에서 일어난 시위가 대표적이다. 강계면 만세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정준(鄭儁), 김경하, 한봉민(韓奉珉) 등이었다. 당시 김경하와 정준은 영실중학교(英實中學校) 교사, 한봉민은 명신학교(明新學校) 회계였다. 정준은 기독교인으로 4월 8일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준 등은 4월 2일 간호사인 김관순(金寬淳) 등과 회합하여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태극기에 연명 날인하였다. 연명 날인자는 21명에 달하였다. 거사일은 4월 8일로 정해졌다. 이들은 4월 5일 금융조합 서기인 유상우(劉相禹) 등을 읍내 광신여학교(光新女學校)로 초대하여 4월 8일에 거행할 조선독립운동회 참가를 권유하는 등,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며 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김명하는 영실중학교 학생으로 형 김경하와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형으로부터 태극기를 제작할 것을 지시받고, 같은 학교 학생들과 2,000여 매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여 시위 당일 수천 명의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4월 8일 오전 11시경 읍내 기독교회당의 타종을 신호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등 약 700~800여 명은 구한국(舊韓國) 국기(國旗)를 세우고 만세를 연호하며 강계 시내를 행진하였다. 즉시 출동한 일본군 보병과 헌병은 시위 군중을 향해 아무런 사전경고 없이 총을 쏘았다.
이로 인해 시위를 이끌던 정준 등 4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사망자 중 1명은 임산부였다. 무력 진압에 만세 군중들이 피신을 하자 군경은 끝까지 추격하여 53명을 체포, 구금하였다.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태형(笞刑) 판결을 받은 11명 중 2명이 집행과정에서 사망할 정도로 가혹한 처벌이 가해졌다.
김명하는 4월 8일 강계면 장날에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하여 수천 명의 군중들과 함께 시위행진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태(笞) 90대를 받고 석방되었으나, 장독(杖毒)으로 1919년 5월 25일 순국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