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열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 3 · 1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에서 일어난 사천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일본 헌병 상등병 등을 살해하는 데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이다. 1894년 태어나서 1927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생몰년은 확실하지 않다. 윤상열(尹尙悅, 尹相烈)이라고도 한다.
사천 3 · 1운동은 인접한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시작되었다. 장날인 1919년 3월 4일 아침 일찍부터 원장리 시장에 집결한 기독교인들은 오전 9시경 행동을 개시하였다. 먼저 지석용(池錫湧)이 나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 뒤로 임이걸(林利杰) 등의 독립에 관한 연설, 만세 선창으로 이어졌다.
원장리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던 기독교인들과 군중들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으로 향하였다. 시위에 참여한 행렬은 5,000~8,000여 명에 달하였으며, 최능현(崔能賢) · 송현근(宋賢根) 등이 앞장서서 시위 대열을 이끌었다. 송현근은 3월 3일 사천에서 시위를 벌이다 검거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천행을 주장하였다.
3월 4일 만세 시위는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기독교인들이 상호 연계하여 추진되었다. 오전 11시경 군중들이 사천시장 입구에 이르렀을 때 잠복하고 있던 사천 헌병주재소 헌병과 헌병보조원들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해 원장리 교회 신도 중에서만 6명이 사망하였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부상당하였다.
오후 1시경 실탄을 모두 소진한 사천 헌병주재소원 4명은 군중의 공격을 받아 사망하고 헌병보조원 숙소도 소각되었다. 오후 5시경 강서 파견대로부터 보병 11명이 출동하여 군중을 강제 해산시켰다. 일제 자료에 의하면 시위 군중은 5,000명으로 추산되며, 78명이 검거되었다. 일제는 시위대 측 사망자 12명, 부상자 8명으로 집계하였다. 그러나 시위에 참석했던 윤상열(尹相悅)은 사상자가 60명에 달한다고 주장하였다.
윤상열은 사천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서용석(徐用錫) 등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을 행진하였다. 또한, 일본 헌병에 대항하여 일본 헌병 상등병 등을 살해하는 데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