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년은 미상이고, 1919년 3월 3일 사망하였다. 한봉주(韓鳳周) 부인(婦人)이라고도 한다.
1919년 3월 3일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에서는 대규모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일어난 만세시위는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이 주도하였다. 정오경 2,000명 정도였던 만세시위 군중은 오후 3시경 4,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4시경 군중은 북문리(北門里) 안주 헌병분대를 포위하고 구한국(舊韓國) 국기(國旗)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한편, 3월 1일 안주읍 시위로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궁지에 몰린 일본 헌병들은 시위 군중을 향해 총격을 가하였다. 시위 군중은 사망자 2명, 부상자 5명을 내고 물러났다. 그 후 보병 1개 분대가 도착하여 시위 진압에 투입되었고, 그 과정에서 또다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는 전체 사상자 수를 사망 6명, 부상 12명으로 집계하였다. 3월 3일의 시위로 검거된 사람은 19명에 달하였다.
홍씨는 3월 3일 천도교 안주 교구장인 김안실(金安實) 등이 주도하는 안주읍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오전 율산공원(栗山公園)에서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다. 오후 1시경 헌병대 앞에서 3월 1일 안주읍에서 독립선포식을 하고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헌병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200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