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형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과 강서군 반석면 사천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군중 5,000여 명을 인솔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원장리 시위군중들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고지형은 1921년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7년 순국하였다.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金祭面) 원장리(院場里)와 강서군 반석면(斑石面) 상사리(上四里) 사천(沙川)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금제면 원장리에서 반석면 사천까지 약 25리[약 9.8㎞] 거리에 있었다. 두 곳은 다른 군이지만 각기 면사무소 소재지이며, 5일 만에 한 번씩 장이 서므로 서로 왕래가 잦았다. 사천장은 모락장이라고도 한다.
강서군 반석면 반석교회(盤石敎會) 장로 조진탁(曺振鐸)은 1919년 3월 1일 평양 장대현 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원장리에 도착하여 고지형 등과 함께 반석면과 원장리의 두 교회가 연계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 장로인 고지형은 3월 4일 고향인 원장리에서 군중 5,000여 명을 인솔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4일 10시 원장리 장날 합성학교에서 먼저 지석용(池錫湧)이 나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 뒤로 임이걸(林利杰) 등의 독립에 관한 연설, 만세 선창으로 이어졌다. 독립 선포식을 치른 후,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원장리 시장으로 행진하였다.
장터에 모였던 사람들도 합류하여 시위대의 수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그러자 반석교회 장로 최능현(崔能賢)과 사천장(沙川場) 교회 목사 송현근(宋賢根)은 사천장 시위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동지들이 헌병대 유치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들을 구출하자고 호소하였다.
시위대는 유치장에 갇혀 있는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원장리를 출발하여 사천장으로 나아갔다. 시위에 참여한 행렬은 5,000~8,000여 명에 달하였으며, 최능현 · 송현근 등이 앞장서서 시위 대열을 이끌었다. 오전 11시경 군중들이 사천시장 입구에 이르렀을 때 잠복하고 있던 사천헌병주재소 헌병과 헌병보조원들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맨주먹으로 일본 헌병에 대항하였다. 이로 인해 원장리 교회 신도 중에서만 6명이 사망하였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부상당하였다. 분노한 군중들은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시위대는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하는 헌병주재소 소장과 헌병보조원을 붙들어 처단하고 구금되어 있던 동료들을 구출하였다.
오후 5시경 강서 파견대로부터 보병 11명이 출동하여 군중을 강제 해산시켰다. 일제 자료에 의하면 시위 군중은 5,000명으로 추산되며, 78명이 검거되었다. 일제는 시위대 측 사망자 12명, 부상자 8명으로 집계하였다. 그러나 시위에 참석했던 윤상열(尹相悅)은 사상자가 60명에 달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천장 시위에서 13명이 현장에서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고, 중경상자는 40여 명에 달하였다.
시위가 끝난 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와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 주변 마을에 일본군과 헌병들은 출동하였다. 시위 참가자 색출을 빌미로 사람들을 구타, 체포하고 교회도 파괴하였다. 원장, 반석, 사천 등지를 중심으로 남자들을 무차별 검거하였다. 400여 명을 무차별 검거하여 20여 일간이나 감금하고 고문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체포된 사람들은 평양헌병분대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김제민(金濟民), 최명흠(崔明欽) 등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헌병들은 두 사람의 시신을 피검자들에게 보여주면서 협박하고 자백을 강요하였다.
고지형은 1921년 8월 체포되어 10월 21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살인, 소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옥고를 치르다 1927년 순국하였다.
200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