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이후, 1960년 4월 29일 대구시내의 공·사립 중·고교 교원 60여 명은 ‘대구시조합결성준비위원회’를 조직한 후 전국조직인 교원노조 결성을 촉구했다. 교원노조 결성 움직임은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 1960년 5월 1일 서울 시내 47개 중·고교와 3개 초등학교 교원들은 동성고등학교에 모여 ‘서울시교원노동조합 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5월 7일 대구시내 초등교원과 중등교원 노조가 정식 결성되었고, 15일과 21일 각각 부산 중등교원노조, 초등교원노조가 결성되었다.
1960년 5월 22일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당에서는 300여 명이 모여 ‘대한교원노조연합회 결성식을 열었다. 이후, 5월 말부터 7월 초까지 각 시군별로 단위노조들을 통합해 도별연합체를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1960년 6월 29일 서울에서 서울교원노조와 영호남 교원노조 대표자들이 모여 전국 중앙조직건설 문제를 논의했다.
전국 중앙조직개편 작업을 통해 1960년 7월 3일 대구에서 ’교원노조 전국대표자대회‘가 전국에서 모인 200여 명의 대표들의 참가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1960년 7월 17일 서울 의사회관에서 ‘교원노조 제1차 전국대회’가 열렸다.
위원장에 조일문, 부위원장에 강기철·계훈제·김종길, 사무국장에 김희조, 41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했다. 임원진을 정비한 후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가 발표한 강령은 다음과 같다.
① 우리는 교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해 투쟁한다.
② 우리는 학원의 자유와 민주화를 도모하고 정치적 중립을 기한다.
③ 우리는 민주국가 건설로서 세계평화에 공헌한다.
7월 17일 대회에서 총 83개 교원노조가 구축되었으며 총 조합원 수가 1만 9,883명이었다. 전국교원의 22%가 노조에 가입했으며, 특히 지구별 가입자 수로는 경북과 경남의 조합원 수가 각각 8,000여 명으로 압도적이었다. 교원노조결성 작업에 대해 상황이 진척되어감에 따라 허정 과도정권 내부에서 교원노조의 합법성 문제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교원노조는 합법화투쟁과 각종 학원 비리로 꼽히던 사친회비와 기타 잡부급 폐지운동을 진행했으며, ‘2대 악법’에 대한 반대투쟁에 경북교원노조를 중심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5·16군사정변 이후 1,500여 명의 교원노조 관련자가 체포되었다. 총 9명이 기소되었으며, 경북교원노조 위원장 김문심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조직은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