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형기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1950년대에 기독교교육운동, 문서선교운동, 교회 재건과 복구 운동을 전개한 기독교대한감리회 목사이다.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 보스턴대학 신학부,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했다. 1927년 귀국하여 미감리교회 종교교육협회 청년부 간사, 기독교조선감리회 교육국 총무로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1951년, 부산에서 감리교 감독으로 뽑혀 전쟁 피난민과 교회 재건을 위해 모금 운동을 펼쳤다.
류형기는 1927년에 귀국하여 미감리교회 종교교육협회 청년부 간사로 활동했고, 1928년 9월 월간지 『신생(新生)』을 창간하여, 6년간 간행하면서 일제 식민지에서 고뇌하는 청년들에게 희망의 새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했다. 1930년 미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가 합동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가 된 후 1933년 교육국 총무로 기독교 교육을 통한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1934년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단권 성경주석』을 출판했다. 『단권 성경주석』은 『아빙돈 성경주석』을 대본으로 교계 50여 명이 협력하여 번역하고 편집한 첫 학문적인 성경 주1로 고등 비판에 입각한 주2 주3 입장에 서 있었다. 1941년 9월 정춘수 감독의 친일 감리교 혁신교단에 반대하여 목사직을 파면당했고, 1942년 일제에 구속되어 1943년 3월 주4의 죄로 징역 1년과 벌금 100원의 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의 위임으로 ‘조선인쇄주식회사’의 관리인이 되었다. 『영한사전』, 『영어회화』, 기독교 서적 등을 출판했으며, 1948년 웨슬리안대학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 제9대 교장으로 일했다. 6·25 전쟁 직후 기독교대한감리회 총리원장을 거쳐 1951년 부산에서 감독으로 뽑혀 1958년까지 7년간 주5 전쟁 피난민과 교회 재건을 위해 1951년 미국감리교회를 방문하여 12만 달러, 1952년 10만 6천 달러의 보조금을 받았다. 기독교세계봉사회(CWS)와 감리교해외구제위원회(MCOR)는 큰 도움을 주었는데, 1954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감리교회로부터 총 160만 달러의 주6를 받도록 했다.
은퇴 후 미국에서 거주하며 『성서주해』(전4권)를 간행했으며, 미국 유니온신학대학, 독일 하이델베르그대학, 영국 옥스퍼드대학 등에서 연구했다. 1987년 『영한 신약전서』를 출판했으며, 1989년에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