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이민사회의 친교와 교육의 중심이 되어 민족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며, 기독교신앙을 배양하고,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활동한 민족교회였다.
한인 이민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갖게 하고 이를 통해 미국사회로부터 원만한 유대관계를 도모하고, 한인들의 결속과 단결을 증진시켜 민족 정체성을 강화·확립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896년 감리교 의료선교사로 한국에서 활동했던 셔만(Harry C. Sherman)의 부인(Florence Sherman)이 1904년 3월 11일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한인선교부(Korea Mission)를 설립하고 신흥우를 첫 전도사로 초빙하면서 교회가 설립되었다.
신흥우는 1903년부터 1911년까지 남가주대학교(USC)의 유학생으로 학업과 교회 사역을 병행하였다. 그는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처단의거에 대한 재판 때 통역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USC 졸업 후 배재학당의 교장으로 임명되어 귀국하였으며, 후임자로는 하와이한인감리교회의 2대 교역자로 활동하다 1911년 3월 남가주대학교(USC)의 신학부 입학을 위해 LA로 온 민찬호가 2대 교역자가 되었다.
1912년 민찬호는 당시 LA 내 두 개의 한인교회(한인감리교회와 한인장로교회)를 통합하였고, 1919년 USC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고 하와이 한인기독교회로 부임하였다.
민찬호가 하와이로 떠난 이후 통합된 한인교회 내 감리교 출신 교인들은 분립을 시도해 1926년 9월 한승곤을 중심으로 나성한인감리교회(일명 ‘LA한인자유교회’)로 복귀를 선언하였고, 1930년 7월 10일 LA한인감리교회(일명 ‘나성한인감리교회’)로 재조직 되었다.
LA한인감리교회는 1924년부터 나성국어학교를 운영하였는데, 1925년 11월 차경신을 교장으로 맞으면서 본격적인 국어교육의 체제를 갖추었다.
1931년부터 김강을 중심으로 금요토론회가 운영되었고, 1938년 이경선이 교회 부목사로 부임한 이후 금요토론회는 점차 기독교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진보세력의 결집체로 발전하였다. 이들 진보세력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나성한인감리교회의 교인들이었고 이후 조선의용대미주후원회와 조선민족혁명당북미총지부를 결성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해방 전후까지 교회에서 활동한 주요 사역자는 신흥우, 민찬호, 한승곤, 황사용, 이진묵, 장기형, 김하태, 오창희 등이며, 현재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