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삼덕 ()

개신교
인물
일제강점기 학동교회, 숭덕학교를 설립한 개신교인. 전도부인.
이칭
이칭
전도부인, 학동교회, 숭덕학교, 강서읍교회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840년(헌종 6)
사망 연도
1932년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학동교회, 숭덕학교를 설립한 개신교인. 전도부인.
생애 및 활동사항

1843년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벽위에서 양반집 딸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한문과 한글을 깨쳤고, 17세에 강서면 암저리에 사는 김선주와 혼인하였다. 보령 군수로 부임한 남편을 따라 갔던 그는 1890년경 남편이 관직을 사임하자 고향에 정착하였다.

이 무렵 평양에서 병원선교를 하던 홀(W. J. Hall)선교사를 만난 후 홀의 조수인 강서 출신 오석형을 통해 기독교를 배우게 되었다. 한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글 전도책자 『신덕경』과 『세례문답』, 『미이미교회문답』 등을 읽으며 공부하였다. 두 며느리에게도 전도하였고, 남편과 시집 식구들의 탄압 속에서도 매주 평양 남산현교회에 참석하였다.

1895년 그의 집을 방문한 스크랜턴(W. B. Scranton) 선교사가 전삼덕의 남편을 전도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그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 남자 선교사와 직접 대면하지 않고, 방 한가운데 휘장을 치고 머리 하나 내놓을 만한 구멍을 낸 후에 거기에 머리를 내밀어 세례를 받는 ‘휘장세례’로 받았다. 이후 그의 며느리도 세례를 받았다. 몇 년 뒤 아들들의 후원과 평양 출신 전도인 김재찬 주동으로 강서읍교회를 설립하였다. 평양에서 매년 개최되는 여자사경회에 참석하여 전도인 훈련을 받았다. 1901년 미감리회 에스티(E. M. Estey) 여선교사로부터 전도부인(Bible Woman)으로 임명되어 함종으로 파견되었다. 장병일 권사와 함께 함종에서 전도인 사명에 충실하였고, 1910년까지 전도부인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전도부인에서 은퇴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고, 1917년 학동교회와 숭덕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로빈스(H. P. Robins) 여선교사가 교장이 되었고, 그는 학감이 되었다. 남존여비 분위기 속에서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고, 찾아오는 여자 아이들을 무료로 가르쳤다.

그의 전도로 교인이 된 사람이 약 600명에 이르렀으며, 그중에 교회와 사회 각계각층에서 지도급 인물로 성장한 사람도 많았다. 1925년 2월 27일 학동교회에서 그의 전도로 설립된 강서·함종·삼화 등지의 아홉 교회가 연합으로 ‘전삼덕 여사 전도 30주년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참고문헌

『한국 영성 새로 보기: 자료로 읽는 한국교회 영성사』(이덕주, 신앙지성사, 2010)
『한국교회 처음여성들』(이덕주, 기독교문사, 1990)
『한국감리교의 선구자들』(장병욱, 성광문화사, 1978)
집필자
김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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