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대회의 역사적 연원은 1945년 7월 19일~20일에 조직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일제의 강력한 종교통합정책으로 조직된 이 단체는 상부조직을 먼저 결성하고 지방 교구 조직을 추진하던 중 8·15해방을 맞이하였다. 장로교와 감리교, 구세군 등 개신교교파 교회들의 통폐합으로 이루어진 교단 조직이었기 때문에 8·15해방 직후에 있던 유일한 전국 규모의 교회 조직이었다.
단체의 임원들은 조선총독부의 임명을 받았던 인물들로 이들은 변화된 현실에 대한 대응책과 함께 교회의 정체를 그대로 지속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두가지로 제시하였다. 첫째, 조직 결성이 일제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나 교파를 초월한 ‘단일’ 교단이 결성된 것인 만큼 그것을 존속시키는 것이 한국교회의 장래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한국교회는 1905년 초교파적 단일의 ‘대한예수교회’를 세우려고 하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었고, 3·1운동 직후에는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교파 합동 운동이 시도되었다가 중단된 사례도 있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교파 간의 갈등 사건들을 경험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남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통합된 교파의 교단 조직을 존속시키려는 강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둘째, 교회 외적인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서 근거를 찾고 있었다. 해방 이후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이 모두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건국이념을 제공하며, 그들을 적극 지원해야 할 의무가 기독교에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각 교파의 통합체인 교단이 그대로 유지되어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다는 이유였다.
위와 같은 배경하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은 남부대회로 전환되어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였는데, 교단 통리였던 김관식 목사를 비롯해 장로교의 김영주, 김춘배, 함태영, 감리교의 강태희, 김영섭, 심명섭 목사 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새문안교회에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간판을 ‘조선기독교단’으로 바꾸어 걸어 놓는 일부터 착수하였다.
1945년 9월 8일에 조선기독교남부대회를 소집하였으나, 감리교의 일부 인사들이 감리교의 재건을 선언하고 퇴장함으로써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일부를 제외한 교단 관계자들은 남부대회를 명실상부한 교회 통치조직으로 개편하기 위해 1945년 11월 27일~30일에 정동제일교회에서 제1차 조선기독교남부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에서는 김관식(장로교) 대회장을 비롯한 임원진이 선출되었고, 순교자 32명에 대한 ‘순교자 추도회’를 가졌다. 또한 ‘조선독립촉성을 위하여 3일간 기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절대지지’ 등을 비롯하여 17개의 사업 항목을 선정하여 실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중 제일 먼저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은 기관지 발행으로, 1946년 1월 17일 『기독교공보』란 제호의 주간 신문을 창간하였다.
그러나 남부대회는 장로교와 감리교 내부에서 교단 재건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큰 도전을 맞게 되었다. 여기에 38선으로 인한 남북 교회 분단도 남부대회의 정통성 확립에 큰 한계가 되었다. 이후 1946년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제2회 조선기독교회 남부대회가 개최되었으나, 교단재건이 활성화되면서 해체 수순을 밟았다.
조선기독교남부대회는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한국교회가 ‘하나된 교회’를 수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친일조직과 친일 관련 인사들이 대회를 주도한 것은 한국교회의 정통성을 획보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한계를 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