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였고, 1911년 서울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미감리회 전도사로 평양에서 목회하던 중 ‘105인 사건’으로 큰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은 평안도 지역의 민족주의자 및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1910년 음력 8월 29일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여하러 가는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일제의 날조 사건이었다. 당시 기독교 인사 6백여 명이 체포되고 선교사 23명이 연루자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일제는 주모자로 지목된 윤치호, 이승훈, 임치정 등 105인을 기소하여 실형을 선고하였고, 나머지를 불구속 처리했다. 이에 ‘105인 사건’으로 불린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그는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결국 6년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였다. 1913년 10월 복심법원(覆審法院)에서 윤치호, 양기탁 등 주모자 6명만 5~6년의 형을 언도받았고, 안경록을 비롯한 99명은 무죄로 석방되었다. 1914년 출옥한 그는 미감리회 조선연회의 학습을 받기 시작하였고, 강원도 영월로 목회지를 옮겼다. 1914년 6월 집사 목사 안수를 받은 뒤, 1915년 강릉교회로 옮긴 그는 1918년 장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10년을 강릉지방 목회에 전념하였는데, 1919년 강릉지방 감리사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안경록은 교회 청년들을 규합하여 강릉지방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당시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 안에 시위 본부를 둔 강릉 청년회 회원들과 협의하여 추진하였는데, 4월 2일 강릉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 교인들과 함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뿌리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일로 옥고를 치루고 난 뒤 1924년 진남포 신흥리교회 담임자로 옮겼고, 2년 동안 목회하면서 삼숭(三崇)학교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만주 선교사로 파송되어 신경 영고탑교회에서 1년간 담임자로 활동하였다.
귀국 이후 황해도 수안(遂安)교회에서 교회 청년들과 절제운동을 전개하고 자금을 모아 공동 농장을 설치하여 경영하며 농촌자립운동을 펼쳐나갔다. 농촌운동 차원에서 농장 경영에 집중하였고, 지방교회들을 도우며 부흥회를 다니기도 하였다. 1945년에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