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우신(虞臣), 호는 초원(椒園)‧수관거사(水觀居士)‧폭포암주인(瀑布庵主人)이다. 강화 하곡학파의 양명학을 계승하여 진(眞)과 가(假)를 엄격히 구별하였으며, 인의(仁義)에 가탁(假託)하여 폭력정치를 행사하는 허위의식을 비판하였다. 유학 이외에도 노자와 불교의 사상을 두루 섭렵하여 회통하고자 하였다.
정종의 열 번째 아들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손으로 명문가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세자세마를 지낸 이진급(李眞伋)이고, 아버지는 이광현(李匡顯: 17081776)이며, 양아버지는 아버지의 사촌 형인 이광명(李匡明: 17011778)이다.
조부 대(代)에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에 휘말려 가문이 몰락하였으며, 12세인 1755년(영조 31)에는 아버지와 양아버지가 모두 을해옥사(乙亥獄事)에 연루되어 아버지 이광현은 경상도 기장(機張)으로, 양아버지 이광명은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어 남북으로 오가며 두 부친을 모셨다.
아버지와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온 집안이 살 길이 없어 거의 20여 년 정도를 동량‧송악‧장단‧서강 등으로 떠돌며 살았으며, 노년에 강화도로 돌아와 초피산(椒皮山) 밑에 정착하여 학문에 매진하다가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가문이 몰락하여 정치와 사회활동이 어려운 현실에서도 귀양을 간 아버지와 양아버지를 봉양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세간살이는 한 짐이 채 못 되었으나, 성인의 뜻을 깊이 연구하였고, 노자와 장자, 불교의 서적과 의서(醫書)를 두루 익혔으며, 한 가지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큰 부끄러움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 요점은 경술(經術)을 근본으로 하여, 인륜(人倫)을 사랑하고 검소함을 귀히 여겼으며, 정의(情誼)에 돈독하였다.
이충익의 학문은 이광려(李匡呂)에게서 배웠으며, 양아버지를 통하여 정제두의 아들인 정후일(鄭厚一)과 사위인 신대우(申大羽: 17351809) 등 강화학파의 학문을 계승할 수 있었다. 또 정제두의 손자 사위였던 신재(信齋) 이영익(李令翊: 17381780)과 특별한 교분을 맺고 학문적인 토론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유학 이외에도 노장(老莊)사상과 불교에 두루 회통하여 노자의 『도덕경』을 풀이한 『담노』라는 저술을 남겼고, 불교에 심취하여 강화도(江華島) 마니산(摩尼山) 망경대(望京臺)의 승려 혜운(慧雲)과 함께 암자를 짓고 폭포암주인(瀑布庵主人)으로 자호(自號)하며 지내기도 하였다. 또 서예에도 능하여 해서(楷書)와 초서(草書)를 잘 썼다.
진(眞)과 가(假)를 엄격히 구별하는 토대 위에서 인의(仁義)에 가탁하여 폭력정치를 행사하는 당시의 집권세력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이충익의 사상은 전체적으로 양명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불교와 고증학적 사유를 전개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저술로는 『초원유고(椒園遺藁)』 2책과 『초원담노(椒園談老)』가 있다.